가리포진성 완벽한 원형복원으로 일제가 남기고간 잔재들 모두 청산할때(동헌터에 있던 군청도 군소리 없이 옳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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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리포5백주년 작성일20-03-15 09:06 조회6,51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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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에서 바라본 광주천과 광주 도심 전경. |
‘국가기록원과 함께 하는 남도 근대화 탐사(남도 근대화 탐사)’는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지역의 역사적 사실을 자료에 근거해 밝혀냈다. 광주를 비롯한 전남의 각 시군의 도시 구성, 행정구역, 상하수도·전기 등 기반시설, 주요 도로 및 하천 정비 등은 이 시기에 상당부분 완성됐다. 이는 철저하게 ‘침략’과 ‘수탈’이라는 일제의 이해득실과 우리나라에 진출한 일본인들의 편의를 전제로 한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일제의 노골적인 의도에 지역민은 차별 철폐를 주장하고, 영세민으로 전락한 계층에 대한 지원, 경양방죽 등 대대로 전해오던 지역자원의 보전 등에 나섰다.
◇현 도시 문제의 뿌리는 일제강점기 왜곡 정책=목포를 제외한 광주, 나주, 순천은 읍성, 여수는 전라좌수영성이 구시가지의 중심이 되고 있다. 1897년 개항장으로, 각국공동거류지가 조성된 목포는 조선이 끝까지 주도권을 잡으려했지만 결국 일제에 의해 그들 중심으로 시가지로 재편돼갔다. 읍성이나 전라좌수영성은 본래부터 행정·사법·군사 등의 특수한 기능을 수행하는 별도의 공간이었다. 읍성 주위로 시장이 형성되고, 촌락이 집결하면서 그 일대의 인구 밀도는 비교적 높았지만, 읍성 내부는 철저히 중앙집권을 상징하는 국유지였다. 1897년부터 시작되는 일본인들의 호남 진출은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강제병합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목포로 들어와 나주를 거쳐 광주에 자리를 잡는다. 정치·경제·행정·군사 등 모든 분야를 장악한 일제는 ‘조선의 보고’라 불리던 전남을 약탈하는 시스템 구축을 서둘렀다. 개항장과 내륙도시를 연결하는 도로와 함께 특히 당시 사람과 물자의 대량수송할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철도를 중시했다.
도로는 전국 가지에서 출몰해 괴롭혔던 의병 진압을 위한 군대 이동이 주목적이었다. 1907년 시작해 1910년 말 완공된 경목선의 광주∼목포 구간이 최초의 근대식 도로에 해당한다. 폭 6m, 곡선반경 15m의 이 도로 양측에는 ‘최초로’ 1m 폭의 하수구가 설치됐다. 이 도로는 광주로 들어오면서 여전히 광주의 핵심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던 읍성을 허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농지를 소중히 여겨 읍성 내부 토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일본인과 기업, 통치기관들이 이를 집중 매입해 시가지로 개발했다. 그것이 곧 지금의 구시가지다.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시급했던 일제는 읍성을 허문 자리에 도로를 만들었다. 지금 광주·나주·순천·여수 구시가지의 도로는 모두 읍성 자리다. 읍성 철거와 동시에 일본인들의 토지 점유는 도시 전지역에서 나타난다.
철도는 일제가 쌀과 목화, 수산물로 대표되는 전남의 ‘보물’들을 본토로 실어나르는 도구가 된다.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인 호남선은 부설권을 두고 조선과 일제의 마찰 속에 경부선보다 10년 가까이 늦은 시점에 개통된다. 이 철도는 목포와 송정리, 그리고 광주의 초고속 성장을 이끌고, 내륙 거점인 광주와 순천·여수를 연결하는 광주∼여수선 설치의 계기가 된다. 전기, 상하수도 등 도시기반시설은 일본인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설치됐다.
문제는 이 일제강점기의 도시정책의 ‘찌꺼기’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지역 특성은 무시된 채 각 도시에 일본인 중심의 시가지가 조성됐고, 자동차 중심의 신속한 대량 수송을 위해 도로와 철도가 놓였다는 것이다.
◇새롭게 드러난 진실들= 경인선, 경부선 등을 외국 열강에 허무하게 내놓아버린 쇠락한 조선은 끝까지 호남선은 자체적으로 부설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일제와의 다툼 끝에 결국 경부선에 비해 10년 정도 늦게 호남선이 놓이면서 결국 지역발전도 더딜 수 밖에 없었다. 광주 성장의 결정적인 시점은 나주에 있던 관찰부가 이전한 1896년 8월4일이다. 1895년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 전라도의 관찰부는 전주와 남원, 그리고 나주에 들어섰다. 이 관찰부가 광주로 이전하면서 후일 전남도청이 광주에 들어설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항일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나주에서는 을미사변, 단발령 등으로 항일의병이 크게 일어났고, 이들이 군수와 군사책임자를 살해하면서 당시 초대 전라남도 관찰사 윤웅렬이 광주로 도망쳤다. 윤웅렬은 의병 진압 후에도 나주 복귀를 거부하고 광주에 영주하는 방안을 정부에 간청해 결국 도청이 자리하게 됐다. 새롭게 공개된 1911년 조선총독부 내무부 지방과가 작성한 ‘지방청 이전 행정구역 변경에 관한 서류’에는 이 과정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이처럼 관찰사의 ‘돌출행동’으로 광주에 자리한 전남도청의 이전을 재검토하고 나섰다. 관찰부가 광주로 이전한 지 15년이 지난 시점이다. 목포는 개항과 동시에 가장 먼저 발전하고 있던 도시 목포가 1순위, 나주가 2순위, 광주는 3순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는 이 전남도청을 유지시켰고, 호남 제1의 도시가 됐다. 이외에도 이번 시리즈에서는 광주는 물론 전남 주요도시들의 도로, 전기, 전화, 상하수도의 개설 및 개통시기를 각각의 서류에 근거해 적확히 제시했다. 지역 도시기반시설의 역사를 재정립한 것이다.
◇도시역사, 도시재생정책의 핵심=도시의 특성은 그 도시가 형성된 과정, 즉 역사에 기반한다. 경양방죽과 광주천으로 대표되는 광주는 시내 곳곳에 하천이 지나는 ‘물의 도시’였으며, 일제에 의한 도시화 이전 마치 숲과 같이 나무가 가득했다. 광주천에는 큰 장과 작은 장이 있어 사람들로 북적였고, 전국 최초로 영세민들을 위한 주거복지시설에 해당하는 갱생지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호남의 세곡이 집결하는 곳이던 목포는 조선정부와 일제의 실랑이 끝에 일본거류지가 아닌 각국공동거류지가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도시로 성장해갔다. 하지만 거류지 운영은 일제가 중심이 됐으며, 한국인과 일본인의 마찰이 극심했다. 나주는 항일의병이 전국 어느 도시보다 치열하게 일제와 싸웠던 ‘의로운 도시’였지만, 그로 인해 도시화 및 근대화에서 소외됐다. 수산물이 풍부한 여수는 일본 본토와 중국을 사이 중개무역지로 이름을 날렸고, 순천은 사통팔달의 교통과 다양한 교육기관이 자리해 인구가 밀집됐다.
어쩔 수 없이 일제가 그려놓고 간 도시 구상은 별다른 변화 없이 해방 후에도 존속됐다. 중앙정부 주도의 도시정책, 고밀도 주거지, 자동차 소통 위주의 도로, 편중된 도시기반시설, 지역민의 참여구조 미흡 등 그 ‘기조’는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따라서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도시재생은 일제의 밑그림을 지우고, 본연의 역사를 되찾는 것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또다시 ‘재생’을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윤현석기자
광주일보) ww.kwangju.co.kr/read.php3?aid=1360681200489184188
민족의 해방 75주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독립.통일도 되고 있지 못해 민족의 통한이 너무나 크다.
일제가 남기고간 잔재들을 없애기 위해 내년이면 가리포진 5백주년인 만큼 가리포진 성곽 안밖의 모든 공공기관, 학교 마을들을 외곽으로 옳겨야 하며 동헌에 자리잡고 있는 군청도 잔말없이 이전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군청이전 불가능하네 뭐네소리는 일제청산을 부정하자는 소리나 마찬가지.
군,현상으로는 완도는 124년밖에 안되는 역사를 가진 동네로 정통성이 없는 동네같다는 서글픈 생각이 아닐수 없건만 완도의 진정한 재도약은 일제가 남기고간 동네스타일을 청산해 다시 우리민족 스타일로 탈바꿈 시켜야 한다.
군청은 물론이고 지역정치권, 유지, 지역사회단체들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달라~!
가리포진성 원형복원은 내부 한일전의 연장선이며 한국이 승리할려면 반드시 원형복원이자 군청사이전은 절대 필수다~!
완도의 김영삼이 이래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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