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국 선배님께 답합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갑천폄 작성일08-10-08 09:45 조회3,886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이경국 선배님께 답합니다.
1. [그런데 요즈음 인터넷상의 당신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완도 지역사회를 갈등과 반목으로 몰아가고자 하는듯이 보여 한심하고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 주신 글의 말투가 선배님의 것이 아닌 것처럼 좀 어색하게 들립니다.
저는 미력이나마, 청해진 완도의 역사를 바로잡고 지역사회의 갈등과 반목을 치유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래서 군집행부나 완도신문이나 차별하지 않고, 잘한 것은 칭찬하고 잘못된 점은 비판하는 것입니다.
2. [요즘 당신이 올린 글들을 보면 공적인 입장이 아니라 사적인 입장에서 여과 없이 올린 글들로 보입니다. 나는 당신의 평소 생각과 인격이 그대로 담겨있는 글들을 보며. 제대로 알고 글을 올리라는 당부를 하기 위하여 직접 만나 그동안 완도신문이 지나온 과정을 설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 지난 10월 2일 선배님의 요구로, 모 씨와 함께 선배님을 만나 뵌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올린 저의 글의 어떤 부분에 사적인 입장이 나타났습니까? “완도신문 소유권 문제제기의 중간 결산”입니까, 아니면 “민공노 김창균 지부장님과 간부님들께”입니까, 그도 아니면 “완도 민주개혁 세력에게 드리는 고언”입니까?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십시오.
3.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완도신문 관련 당사자인 내말은 안중에도 없이 김 박사의 개인감정으로 대중매체에 글을 올림으로써 사회적물의가 크다고 생각하여 말 돌릴 것 없이 직접 나서서 사실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 ‘글 그만 올리고 좋은 방향으로 수습하라’는 선배님의 충고를 고려하여, 10월 2일 이후로는 글을 올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5일 후 갑자기 글을 올리시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4. [당신의 글 중에 선현들의 항일운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완도사람으로서 긍지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토록 자랑스러운 우리 고장 역사를 담아 보전하고자 한 “완도군 항일운동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편찬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 중 사단법인 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에 돈이 없다는 둥 여러 이유를 대며. 중도에 편집위원을 사퇴해버렸습니다. 이러한 당신의 무책임하고 반 완도적인 행위는 정당한 처사였는지 묻습니다.]
→ 항일운동사 편찬이, 짤막한 신문 자료를 위주로 하여 겉만 번지르르한 미완의 책을 서둘러 내는 것보다는, 우선적으로 연로한 생존자들의 회고담 녹취를 풍부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당시의 전/현 회장님께 올렸으나 반응이 없고, 또 개인적인 연구활동 때문에 바빠서 사퇴한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생존해 계시던 많은 분들이 이제 돌아가시고 안 계십니다. 저는 지금도 솔직히, 재력이 미약한 우리 군의 귀중한 예산이 낭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시 저는 선배님과 개인적인 교류가 없어서, 사퇴나 운영 등과 관련된 이야기를 선배님과 나눈 기억이 없습니다.
5. [완도신문 김정호 편집국장이 당신의 뜻을 모두 인정하지도 않고 받들지 않으며. 칼럼을 계속 싣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완도신문을 비방하는 당신이 정말 지식인인지. 지성인인지 안타깝습니다.]
→ 저는 김 국장에게 저의 뜻을 모두 인정하고 받들라고 요구한 일이 없습니다. 또한 저는 그런 이유로 완도신문을 비방한 적도 없습니다. 또한 제가 낸 칼럼의 등재가 한 2주 가량 연기된 적은 있어도, 거부되어 실리지 못한 일은 없었습니다.
6. [나는 완도 신문에서 손을 뗀지 2년이 지났어도 칼럼한번 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후임 경영자인 김정호 편집국장에게 부담을 줄 수 없어서입니다.]
→ 어느 정도 정당한 내용의 글을 김 국장이 완전히 거절한 적은 없다고 기억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명분도 알고 나름대로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풍부한 식견을 가진 선배님께서 한번 칼럼을 시도해 보시길 권합니다.
7. [당신이 완도신문에 올린 칼럼 중에 ̋완도를 제주도 특별자치구에 합병해야 한다.̋는 논리가 진정 맞다. 라고 생각하십니까?]
→ 칼럼은 근거가 제시된, 글쓴이의 주관적 주장입니다. 저는 제 주장에는 늘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제 의견에 동조하는 분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8. [또한. 생일도 백운산을 헐어내어 건설골재로 사용하고 그곳에 잔디 광장 등 관광 시설을 건설하자는 논리가 양식 있고. 양심 있는 지역사회 젊은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백운산을 파괴해 건설골재로 사용한다면 향후 50여년을 채취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강산을 가장 아름답게 보존하는데 앞장서야 할 젊은 식자의 의견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는지?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글을 완도신문에 게재 하겠다는 당신의 발상이 황당합니다.]
→ 한 때 그런 의견을 사석에서 말 한 적 있습니다. 77번 국도의 다리들도 이른 시기에 놓을 수 있고…아무튼 핵폐기장 유치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나 최근 완도타워에 여러 번 올라가 아름다운 다도해의 파노라마 경관을 음미하면서 백운산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의견을 완도신문에 칼럼으로 낸 적이 없고 칼럼으로 쓰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습니다.
9. [장보고의 이름으로 올린 글에 대한 컴플렉스가 아닌가하는 의구심까지 듭니다.]
→ 소이부답입니다. 최근 말고, 제가 칼럼을 쓸 당시까지 ‘장보고’의 이름으로 완도신문에 실린 칼럼을 본 기억도 없습니다만.
10. [그리고 양심적이라면 당신의 학력을 정확하게 밝혀야 할 것입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을 뿐 대학은 서울대학이 아닌 걸로 알고 있음으로 당신이 졸업한 대학도 기제 함으로 당신의 학력을 평가할 수 있고 당신의 의견을 정당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양심적”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시는군요. 나의 학력은 나에게 영어를 배운 자모님들도 다 아는 이야깁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쟁을 다 보셨을 것 같은데, 또 요구하시니 새삼스럽군요. 저는 완도초등, 완도중, 광주고, 경희대 물리학과,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 석사/ 박사 과정을 졸업했습니다.
칼럼 약력은 보통 대표적인 것 한 두 가지 정도 넣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타교 이과 출신으로서 상당히 어려운 관문들을 여럿, 인정받을 만큼 제대로 통과했지만, 정치학자로서 저의 경력은 경희대 학부 학력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뭐 그런 인정받은 것까지 자랑하려고 물리학과 경력을 넣겠습니까? 선거 출마자도 아닌데, 칼럼하나 쓰면서 장황하게 말입니다.
전에 저의 학력에 대해 어느 분이 언급하셨지만, 모두 다 사실입니다.
11.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신에게 전했던 완도신문의 창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하게 밝히겠습니다.
완도신문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말미암아 1987년 6,29선언이 있었고 언론자유가 보장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국 곳곳에서 지역신문창간이 줄을 이었습니다.
1989년 충남홍성신문의 최초발행을 시작으로 전남에서는 영광신문과 옥당신문이 같은 지역에서 동시 창간되었다가 2개월 만에 중단되었고, 1990년 목포신문과 해남신문에 이어 완도신문이 창간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7~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6,29선언을 얻어 냈듯이 90년대 지방자치를 앞두고 해야 할 일로 지역신문을 발행하여 지역민의 정서와 인정을 하나로 묶어 완도군민을 통합하고, 함께 잘사는 행복한 고장으로 가야 했기에 과감하게 시도하였습니다.]
→ 이 점 저도 십분 인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완도 민주개혁 세력에게 드리는 고언”에서 완도신문 창간은 완도 청해진 민주화 운동의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전통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완도신문이 소중한 군민의 신문이기 때문에, 제가 몇 년 전부터 계속 김 국장에게 완도신문의 소유권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12. [지역주민의 지역신문 참여를 높이고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발행을 위하여 지역마다 지역주민공모주 형태로 출발했습니다. 대표적으로 해남신문이 YMCA, 농민회, 전교조 등 550명의 주주가 참여하였습니다.
우리도 완도군민의 뜻을 모으고자 1990년 3월 21일 구 교육청(현도서관)에서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발기인 대회를 가졌습니다.
이 모임에서 제가 창간준비위원장을 위임받았습니다, 이후 군민공모주를 모집하면서 문화관광부에 등록증 신청을 하여 1990년 6월 1일 그토록 받기 어려운 발행등록증을 교부받았습니다.
초창기 전국적으로 지역신문에 대한 노하우가 없는 상황에서 본격적인 창간준비에 나선 완도신문은 기자 등 직원을 10여 명이나 채용하여 인건비 등 지출이 너무 많아 운영상에 많은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여러 문제로 그동안 청약된 모금액 1천여만 원을 운영비로 전환하기 위하여 발기인 회의를 거쳐 1990년 9월8일 역사적인 완도신문을 창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식청약은 서정창 전 도의원과 여러분의 노력으로 1만주(5천만 원) 중 2천여 주(1천여만 원) 20%정도의 주식이 모금되어 법인설립을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완도신문을 책임진 발행인이자 대표로서 집을 저당하고 사체를 끌어 모아도 신문사 운영비가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창간이후 2년 정도 지나서는 기자 등 직원의 월급이 밀리는 일이 잦아 1992년 6월에는 직원들이 ̋부도덕한 사주가 봉급을 안준다.̋ 라는 이유로 야밤에 거리에 대자보를 붙이고 출근하지 않아 8개월 정도의 정간 사태를 가져오게 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관내 기업인, 출향인 여러분을 만나 신문을 살려보려고 백방으로 뛰었지만 지역신문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지역신문의 한계란, 좁은 지역사회에서 잘잘못을 따진다는 자체가 어렵습니다.
지역사회의 공적인 관계를 넘어 개인적인 관계로 신문 한 번 발행하면 뒤 따르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적을 양산하는데 누가 돈 투자하여 지역신문 살리려 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어렵고 힘든 중에도 학문과 언론에 대한 문외한으로서 총대를 메고 무식하고 서툴지만 지역사회의 통합과 올바른 지방자치를 위해 1993년 5월에 혼자서 북치고 나팔 불며. 완도신문을 꿋꿋하게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켜왔습니다.]
→ 좋은 신문을 만드시려고 물심양면으로 애 많이 쓰신 점 저도 당연히 인정합니다.
13. [한 때. 완도군수협의 방만한 경영과 관련하여 조합장을 비판하고 서투른 기법과 어휘로 검찰에 고발당하여 명예훼손으로 구속된 적이 있었습니다.
완도군 수협은 성이 덜 찾는지 주식회사를 설립하겠다는 청약을 무시하고 발행인이 주식대금을 편취 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검찰은 투자자 개인 의사를 일일이 물어 반환을 요구하는 투자자는 환급하고 나머지는 지역신문 발전을 위하여 기부하겠다는 조건으로 수사가 종결되었습니다.]
→ 언제 함께 그 수사기록을 한 번 열람하고 싶습니다. 검찰로부터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기부금으로 돌려진 주식대금은 선배님 개인에게 준 것입니까? 아니면 완도신문 자체에게 준 것입니까? 그러면 완도신문의 법적 주인은 누구입니까? 원출자자를 포함한 완도군민도 아닌 검사가 소유권 문제를 판단한 것입니까?
말 나온 김에, 알고 계시는 원주주 명단을 완도신문에 공개하실 용의는 없습니까? 완도신문사에 원주주명단과 회의기록은 잘 보존되어 있겠지요?
며칠 전 선배님 말씀으로는, 서 모 선배님(약 600만원)과 김국장(약 3~500만원), 그리고 선배님(약 600만원)이 모금을 주도하셨다는데, 원출자자들에게 주식을 교부하든 안 하든, 역사적인 중요한 역할을 하신 원출자자들의 명단을 복원하여 기록으로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14. [이후 최초투자자들을 위하고 바른 완도신문 발전을 위하여 수많은 노력도 했지만 역시 참다운 언론, 올바른 지방자치를 위하여 투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후 편집국장인 김정호 국장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완도신문 발전을 위해 뒷전에 서 있을 뿐입니다.]
→ 그럼 완도신문은 매매된 것이 아닙니까? 김 국장에게 “위임”했다면 선배님이 여전히 완도신문의 사주입니까? 김 국장은 단지 “위임”받기 위해 6200만원을 기부 받아 내놓은 것입니까?
선배님은 선배님의 말씀처럼, “창간준비위원장을 위임받았”을 뿐인데 언제 어떻게 선배님이 완도신문의 주인이 되셨습니까?
제 기억으로는, 완도신문사가 몇 년 전 유한회사로 등기될 때 대표이사는 선배님이고, 이사는 선배님의 친형을 비롯한 몇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김 국장이 완도신문을 인수한 후 이 분들이 모두 바뀌었습니다.
15. [김갑천 박사는 완도신문이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 다시 한 번 자세히 돌아보기 바라며. 소액이라도 투자 할 의사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완도군민과 지역발전을 위하여 아는 만큼 지역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 봉사라도 하기 바랍니다.]
→ 김 국장이 인수할 당시에는 소액이나마 투자할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수 자금을 충분히, 그것도 신속하게 구했다고 들었기 때문에, 괜히 끼어든다는 느낌을 주기 싫어서 김 국장의 언질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말이 없어 접었습니다. 지금은 소액이라도 투자할 뜻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렵게 군민의 신문인 완도신문의 소유권문제를 제기한 것은,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바, “완도군민과 지역발전을 위하여 아는 만큼 지역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 봉사”하는 일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 [그런데 요즈음 인터넷상의 당신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완도 지역사회를 갈등과 반목으로 몰아가고자 하는듯이 보여 한심하고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 주신 글의 말투가 선배님의 것이 아닌 것처럼 좀 어색하게 들립니다.
저는 미력이나마, 청해진 완도의 역사를 바로잡고 지역사회의 갈등과 반목을 치유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래서 군집행부나 완도신문이나 차별하지 않고, 잘한 것은 칭찬하고 잘못된 점은 비판하는 것입니다.
2. [요즘 당신이 올린 글들을 보면 공적인 입장이 아니라 사적인 입장에서 여과 없이 올린 글들로 보입니다. 나는 당신의 평소 생각과 인격이 그대로 담겨있는 글들을 보며. 제대로 알고 글을 올리라는 당부를 하기 위하여 직접 만나 그동안 완도신문이 지나온 과정을 설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 지난 10월 2일 선배님의 요구로, 모 씨와 함께 선배님을 만나 뵌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올린 저의 글의 어떤 부분에 사적인 입장이 나타났습니까? “완도신문 소유권 문제제기의 중간 결산”입니까, 아니면 “민공노 김창균 지부장님과 간부님들께”입니까, 그도 아니면 “완도 민주개혁 세력에게 드리는 고언”입니까?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십시오.
3.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완도신문 관련 당사자인 내말은 안중에도 없이 김 박사의 개인감정으로 대중매체에 글을 올림으로써 사회적물의가 크다고 생각하여 말 돌릴 것 없이 직접 나서서 사실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 ‘글 그만 올리고 좋은 방향으로 수습하라’는 선배님의 충고를 고려하여, 10월 2일 이후로는 글을 올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5일 후 갑자기 글을 올리시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4. [당신의 글 중에 선현들의 항일운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완도사람으로서 긍지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토록 자랑스러운 우리 고장 역사를 담아 보전하고자 한 “완도군 항일운동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편찬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 중 사단법인 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에 돈이 없다는 둥 여러 이유를 대며. 중도에 편집위원을 사퇴해버렸습니다. 이러한 당신의 무책임하고 반 완도적인 행위는 정당한 처사였는지 묻습니다.]
→ 항일운동사 편찬이, 짤막한 신문 자료를 위주로 하여 겉만 번지르르한 미완의 책을 서둘러 내는 것보다는, 우선적으로 연로한 생존자들의 회고담 녹취를 풍부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당시의 전/현 회장님께 올렸으나 반응이 없고, 또 개인적인 연구활동 때문에 바빠서 사퇴한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생존해 계시던 많은 분들이 이제 돌아가시고 안 계십니다. 저는 지금도 솔직히, 재력이 미약한 우리 군의 귀중한 예산이 낭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시 저는 선배님과 개인적인 교류가 없어서, 사퇴나 운영 등과 관련된 이야기를 선배님과 나눈 기억이 없습니다.
5. [완도신문 김정호 편집국장이 당신의 뜻을 모두 인정하지도 않고 받들지 않으며. 칼럼을 계속 싣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완도신문을 비방하는 당신이 정말 지식인인지. 지성인인지 안타깝습니다.]
→ 저는 김 국장에게 저의 뜻을 모두 인정하고 받들라고 요구한 일이 없습니다. 또한 저는 그런 이유로 완도신문을 비방한 적도 없습니다. 또한 제가 낸 칼럼의 등재가 한 2주 가량 연기된 적은 있어도, 거부되어 실리지 못한 일은 없었습니다.
6. [나는 완도 신문에서 손을 뗀지 2년이 지났어도 칼럼한번 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후임 경영자인 김정호 편집국장에게 부담을 줄 수 없어서입니다.]
→ 어느 정도 정당한 내용의 글을 김 국장이 완전히 거절한 적은 없다고 기억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명분도 알고 나름대로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풍부한 식견을 가진 선배님께서 한번 칼럼을 시도해 보시길 권합니다.
7. [당신이 완도신문에 올린 칼럼 중에 ̋완도를 제주도 특별자치구에 합병해야 한다.̋는 논리가 진정 맞다. 라고 생각하십니까?]
→ 칼럼은 근거가 제시된, 글쓴이의 주관적 주장입니다. 저는 제 주장에는 늘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제 의견에 동조하는 분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8. [또한. 생일도 백운산을 헐어내어 건설골재로 사용하고 그곳에 잔디 광장 등 관광 시설을 건설하자는 논리가 양식 있고. 양심 있는 지역사회 젊은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백운산을 파괴해 건설골재로 사용한다면 향후 50여년을 채취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강산을 가장 아름답게 보존하는데 앞장서야 할 젊은 식자의 의견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는지?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글을 완도신문에 게재 하겠다는 당신의 발상이 황당합니다.]
→ 한 때 그런 의견을 사석에서 말 한 적 있습니다. 77번 국도의 다리들도 이른 시기에 놓을 수 있고…아무튼 핵폐기장 유치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나 최근 완도타워에 여러 번 올라가 아름다운 다도해의 파노라마 경관을 음미하면서 백운산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의견을 완도신문에 칼럼으로 낸 적이 없고 칼럼으로 쓰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습니다.
9. [장보고의 이름으로 올린 글에 대한 컴플렉스가 아닌가하는 의구심까지 듭니다.]
→ 소이부답입니다. 최근 말고, 제가 칼럼을 쓸 당시까지 ‘장보고’의 이름으로 완도신문에 실린 칼럼을 본 기억도 없습니다만.
10. [그리고 양심적이라면 당신의 학력을 정확하게 밝혀야 할 것입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을 뿐 대학은 서울대학이 아닌 걸로 알고 있음으로 당신이 졸업한 대학도 기제 함으로 당신의 학력을 평가할 수 있고 당신의 의견을 정당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양심적”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시는군요. 나의 학력은 나에게 영어를 배운 자모님들도 다 아는 이야깁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쟁을 다 보셨을 것 같은데, 또 요구하시니 새삼스럽군요. 저는 완도초등, 완도중, 광주고, 경희대 물리학과,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 석사/ 박사 과정을 졸업했습니다.
칼럼 약력은 보통 대표적인 것 한 두 가지 정도 넣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타교 이과 출신으로서 상당히 어려운 관문들을 여럿, 인정받을 만큼 제대로 통과했지만, 정치학자로서 저의 경력은 경희대 학부 학력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뭐 그런 인정받은 것까지 자랑하려고 물리학과 경력을 넣겠습니까? 선거 출마자도 아닌데, 칼럼하나 쓰면서 장황하게 말입니다.
전에 저의 학력에 대해 어느 분이 언급하셨지만, 모두 다 사실입니다.
11.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신에게 전했던 완도신문의 창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하게 밝히겠습니다.
완도신문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말미암아 1987년 6,29선언이 있었고 언론자유가 보장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국 곳곳에서 지역신문창간이 줄을 이었습니다.
1989년 충남홍성신문의 최초발행을 시작으로 전남에서는 영광신문과 옥당신문이 같은 지역에서 동시 창간되었다가 2개월 만에 중단되었고, 1990년 목포신문과 해남신문에 이어 완도신문이 창간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7~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6,29선언을 얻어 냈듯이 90년대 지방자치를 앞두고 해야 할 일로 지역신문을 발행하여 지역민의 정서와 인정을 하나로 묶어 완도군민을 통합하고, 함께 잘사는 행복한 고장으로 가야 했기에 과감하게 시도하였습니다.]
→ 이 점 저도 십분 인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완도 민주개혁 세력에게 드리는 고언”에서 완도신문 창간은 완도 청해진 민주화 운동의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전통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완도신문이 소중한 군민의 신문이기 때문에, 제가 몇 년 전부터 계속 김 국장에게 완도신문의 소유권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12. [지역주민의 지역신문 참여를 높이고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발행을 위하여 지역마다 지역주민공모주 형태로 출발했습니다. 대표적으로 해남신문이 YMCA, 농민회, 전교조 등 550명의 주주가 참여하였습니다.
우리도 완도군민의 뜻을 모으고자 1990년 3월 21일 구 교육청(현도서관)에서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발기인 대회를 가졌습니다.
이 모임에서 제가 창간준비위원장을 위임받았습니다, 이후 군민공모주를 모집하면서 문화관광부에 등록증 신청을 하여 1990년 6월 1일 그토록 받기 어려운 발행등록증을 교부받았습니다.
초창기 전국적으로 지역신문에 대한 노하우가 없는 상황에서 본격적인 창간준비에 나선 완도신문은 기자 등 직원을 10여 명이나 채용하여 인건비 등 지출이 너무 많아 운영상에 많은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여러 문제로 그동안 청약된 모금액 1천여만 원을 운영비로 전환하기 위하여 발기인 회의를 거쳐 1990년 9월8일 역사적인 완도신문을 창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식청약은 서정창 전 도의원과 여러분의 노력으로 1만주(5천만 원) 중 2천여 주(1천여만 원) 20%정도의 주식이 모금되어 법인설립을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완도신문을 책임진 발행인이자 대표로서 집을 저당하고 사체를 끌어 모아도 신문사 운영비가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창간이후 2년 정도 지나서는 기자 등 직원의 월급이 밀리는 일이 잦아 1992년 6월에는 직원들이 ̋부도덕한 사주가 봉급을 안준다.̋ 라는 이유로 야밤에 거리에 대자보를 붙이고 출근하지 않아 8개월 정도의 정간 사태를 가져오게 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관내 기업인, 출향인 여러분을 만나 신문을 살려보려고 백방으로 뛰었지만 지역신문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지역신문의 한계란, 좁은 지역사회에서 잘잘못을 따진다는 자체가 어렵습니다.
지역사회의 공적인 관계를 넘어 개인적인 관계로 신문 한 번 발행하면 뒤 따르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적을 양산하는데 누가 돈 투자하여 지역신문 살리려 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어렵고 힘든 중에도 학문과 언론에 대한 문외한으로서 총대를 메고 무식하고 서툴지만 지역사회의 통합과 올바른 지방자치를 위해 1993년 5월에 혼자서 북치고 나팔 불며. 완도신문을 꿋꿋하게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켜왔습니다.]
→ 좋은 신문을 만드시려고 물심양면으로 애 많이 쓰신 점 저도 당연히 인정합니다.
13. [한 때. 완도군수협의 방만한 경영과 관련하여 조합장을 비판하고 서투른 기법과 어휘로 검찰에 고발당하여 명예훼손으로 구속된 적이 있었습니다.
완도군 수협은 성이 덜 찾는지 주식회사를 설립하겠다는 청약을 무시하고 발행인이 주식대금을 편취 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검찰은 투자자 개인 의사를 일일이 물어 반환을 요구하는 투자자는 환급하고 나머지는 지역신문 발전을 위하여 기부하겠다는 조건으로 수사가 종결되었습니다.]
→ 언제 함께 그 수사기록을 한 번 열람하고 싶습니다. 검찰로부터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기부금으로 돌려진 주식대금은 선배님 개인에게 준 것입니까? 아니면 완도신문 자체에게 준 것입니까? 그러면 완도신문의 법적 주인은 누구입니까? 원출자자를 포함한 완도군민도 아닌 검사가 소유권 문제를 판단한 것입니까?
말 나온 김에, 알고 계시는 원주주 명단을 완도신문에 공개하실 용의는 없습니까? 완도신문사에 원주주명단과 회의기록은 잘 보존되어 있겠지요?
며칠 전 선배님 말씀으로는, 서 모 선배님(약 600만원)과 김국장(약 3~500만원), 그리고 선배님(약 600만원)이 모금을 주도하셨다는데, 원출자자들에게 주식을 교부하든 안 하든, 역사적인 중요한 역할을 하신 원출자자들의 명단을 복원하여 기록으로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14. [이후 최초투자자들을 위하고 바른 완도신문 발전을 위하여 수많은 노력도 했지만 역시 참다운 언론, 올바른 지방자치를 위하여 투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후 편집국장인 김정호 국장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완도신문 발전을 위해 뒷전에 서 있을 뿐입니다.]
→ 그럼 완도신문은 매매된 것이 아닙니까? 김 국장에게 “위임”했다면 선배님이 여전히 완도신문의 사주입니까? 김 국장은 단지 “위임”받기 위해 6200만원을 기부 받아 내놓은 것입니까?
선배님은 선배님의 말씀처럼, “창간준비위원장을 위임받았”을 뿐인데 언제 어떻게 선배님이 완도신문의 주인이 되셨습니까?
제 기억으로는, 완도신문사가 몇 년 전 유한회사로 등기될 때 대표이사는 선배님이고, 이사는 선배님의 친형을 비롯한 몇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김 국장이 완도신문을 인수한 후 이 분들이 모두 바뀌었습니다.
15. [김갑천 박사는 완도신문이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 다시 한 번 자세히 돌아보기 바라며. 소액이라도 투자 할 의사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완도군민과 지역발전을 위하여 아는 만큼 지역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 봉사라도 하기 바랍니다.]
→ 김 국장이 인수할 당시에는 소액이나마 투자할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수 자금을 충분히, 그것도 신속하게 구했다고 들었기 때문에, 괜히 끼어든다는 느낌을 주기 싫어서 김 국장의 언질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말이 없어 접었습니다. 지금은 소액이라도 투자할 뜻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렵게 군민의 신문인 완도신문의 소유권문제를 제기한 것은,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바, “완도군민과 지역발전을 위하여 아는 만큼 지역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 봉사”하는 일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