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편집국장의 완도신문에 정론직필을 적용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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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갑천(나르미) 작성일08-07-25 09:42 조회3,59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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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편집국장의 완도신문에 정론직필을 적용함(1)
나는 완도에 돌아온 이래, 완도신문 김정호 편집국장과 그 누구보다도 많은 시간을 함께하면서 열정적으로 완도의 현안과 미래에 대해 의견을 나눠왔다.
김정호 편집국장은 내가 아는 완도의 그 누구보다도 솔직한 사람이다. 그래서 때로 의견이 달라 격론을 벌이면서도, 사실 나의 속내는 항상 편안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소통’이 가능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그와 가는 길이 달라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는 최근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서슴없이, 내가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때문에 밑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여전히 나는 그가 진심을 숨기거나 거짓말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지금도 그가 솔직하고 완도의 현안과 미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며, 그 때문에 많은 희생을 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는 좋은 추억을 공유한 후배인 그의 발언에 대해 사적인 감정은 없으며 그의 의견을 존중한다. 다만 그는 군민의 ‘공기’인 완도신문의 편집국장이자 사실상의 사장으로서 '공인'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공개적으로 김 국장에게, 그가 평소에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정론직필’을 적용하려고 한다.
완도신문은, 군민의 모금에 의해 태동한 ‘군민의 신문’으로서 너무도 자랑스러운 우리 모두의 자산이다. 그러나 지금 보기에 ‘군민의 신문’으로서 완도신문의 소유권은 증발해 버리고 없다. 또한 ‘군민의 이익’의 관점에서 볼 때, 김 국장이 근년 들어 완도신문을 운영하는 방식은 매우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1. 최근의 ‘소란’에 대해
최근 나, 김정호 국장, 박남수 선생(영어공부방 다선서원; 필명 장보고) 사이에 소란이 있었다. 그 전말은 대강 이렇다.
지난 6월 20일 쯤 나는 김정호 국장을 만나 무보수로 완도신문에 들어가 일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지역의 경제/정치/사회적 상황이 더욱 어려워지고, 또한 지역의 국회의원 선거구가 바뀌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완도신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인식하였다.
군 집행부와 새로운 국회의원이 군민의 이익을 제대로 추구하도록 견제하고, 광역 NGO 활동을 통해 해남군과 같은 큰 지역과 경쟁하며 우리 지역의 이익을 대표/대변할 수 있는 도구로서 완도신문의 가치에 새삼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군민의 신문’인 완도신문의 영향력을 획기적으로 제고하여, 대내적으로든 대외적으로든 무시당하지 않는 시민세력의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느꼈다. 그래야 실질적 견제가 가능하고 지리멸렬한 시민세력을 묶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런데 나는 평소의 대화를 통해, 김 국장이 늘 신문사 운영자금 고민과 함께 양질의 인력에 대한 갈망과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물론 나와 그의 관점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예를 들면, 광주-완도고속도로, 장보고기념관, 해변공원 등에 대한 견해가 매우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 국장에게 무보수로 들어가 일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취재-특히 기획/심층 취재와 인터뷰-와 편집/교열에서 내가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이는 경영개선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날 우리는 개인적 관심, 완도의 현안, 신문 등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밤을 꼬박 샜다. 그는 나의 제안에 대해, 제대로 일을 하려면 무보수로 하면 안 되고 정식으로 계약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단한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 후 10여일이 지나도록 김 국장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나는 바쁜가 보다 했다가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곰곰 생각해 보았다. 말은 못 하지만 ‘거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래 사설도 주로 A씨가 쓰는 것 같고, 편집부 ‘팀장’으로 박 남수 선생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그의 말을 떠올리면서, 내가 ‘계륵’같은 제안을 하여 곤혹스럽게 한 것 같아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상황이 어려운 것 같은 박 선생이 정식으로 채용되어서 장차 편집을 전담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취재하고 글 쓰는 일에 대해 자신이 ‘프로’라고 하면서 모모 기자 두 사람 10배 몫은 할 수 있다고 자신한 적도 있었다.
완도신문의 역할 중에는, 지역의 진보적 시각을 가진 젊은 사람들을 고용하여 지역을 떠나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여기에 박 선생도 해당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제안을 어떻게 철회하면 모양이 좋을까 의논하려고, 6월 30일 오전 박 남수 선생에게 모처럼 전화를 했다. 그리고 김 국장에게 제안한 것을 대략 이야기 했다.
그런데 박 선생(그와 나는 10년 이상 차이 난다)은 좀 삐딱(?)하게 나왔다. 내가 사장이나 편집국장 자리를 미리 가정하고 제안한 것 아닌가 하는 투로 나의 의중을 탐색하듯 찔러댔다. 좀 불쾌했지만, 성의껏 그날의 대화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바람직한 지역신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 역시 김정호 편집국장 못지않게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꿈 이야기를 할 때는 다소 오버할 때도 있다.
게다가 박 선생이, “여러 신문들이 경쟁을 해야 지역이 발전한다”면서, 뭔가 정보를 캐내려고 자꾸 찔러보는 것 같아 일부러, 내가 한다면 이런 신문을 만들거라는 이야기를 자세히 말하게 되었다. “완도신문의 운영방식이 변할 것 같지는 않아. 나는 기회가 온다면 이런 신문을 내서 완도신문과 경쟁하고 자극을 주고 싶어. 그리고 양심세력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싶네.”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완도신문을 주식회사로 전환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민주화 세력, 섬 주민 등 군민들의 모금으로 출발한 완도신문이 가지는 상징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이상의 이야기는 모두 내가 김 국장에게 오래 전부터 해 온 내용이다.)
박 선생은, 김 국장이 이경국 사장으로부터 완도신문을 인수받은 이후에는 ‘군민 출자’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완전히 김정호 국장의 소유라고 했다.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또한 박 선생은, 만약 나라면 현재 완도신문의 두 기자와 자기 중 어느 쪽을 고용하겠는지 물었다. 나는 그가 자신을 ‘프로’라고 자부했기 때문에, 내가 김정호 국장이라면 먼저 박 선생을 고용할 거라고 말했다.
얘기하다보니 내가 너무 확신에 차 있어서-돈 얘기는 빼놓고(나는 지금도 신문 찍는 데 한 번에 몇 부 찍고 한 번에 얼마 드는지 모른다. 누구에게 들었을 수도 있지만 거기까지는 관심이 없어서인지 기억에 없다.)-박 선생이 내가 곧 신문 찍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그랬다. “생각이 그 정도라면 꼭 신문을 내셔야겠네요.” 내가 자본이 없다고 하자 박 선생은 “피 묻지 않은 자본이 어디 있습니까? 자본은 가리지 마세요.” 했다. 나는 “자네 말도 그럴듯하군.” 하고 웃어 주었다.
작년에 누가 나에게, 몇 사람 출자하여 신문 내자는 사람이 있었다. 그 때 내가 답했다. “내가 친한 정호가 하고 있기 때문에 못 한다. 나중에 혹 정호가 망하기라고 하면 모를까.”
얼마 후 보니 김 국장도 다른 경로로 이 내용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 후 내가 이 얘기를 박 선생에게도 했다. 그는 그 때도 그랬다. “신문은 자꾸 만들어서 경쟁해야 합니다. 저도 도울 수 있습니다.”
같은 날 오후에 김 국장을 만나 제안을 철회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완도신문에 들어가지 않고 또 멀리 가지도 않으면서 이따금 이슈에 따라 칼럼을 지원해 주는 게 자네에게 가장 바람직 할 것 같네.”
그랬더니, 이야기 들었다고 하면서 “저는 정말 치밀합니다. W나 C 신문은 사실 제가 그냥 놔두면서 적당히 이용하고 있습니다. 두 신문이 너무 형편없어서 우리 신문이 좀 못 해도 오히려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님이 신문을 낸다면 방향성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인신공격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구독을 못 하게 하고 광고를 못 하게 압력을 가하여 죽이겠습니다. 어차피 경쟁 아닙니까?”
“그리고 군민신문, 주식회사 이야기는 왜 합니까? 그리고 우리 새*끼들(기자들) 무시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이랬다. 아니 무슨 신문이 곧 나온다고? 나는 기가 막혔다. 그리고 신문이 설사 나온다 하더라도, 자기 말로도 방향성이 같은데, 저와 나 사이에 인신공격을 포함해야 하나? 이런 게 자칭 ‘진보주의자’ 김정호의 경쟁인가?
저 친구가 내가 알던 ‘진보’ 김정호 맞나? 내가 좀 벙벙해 있는 사이에 A씨가 들어왔다. 둘 사이에 선약이 있는 것 같아 별 도리 없이 일단 나왔다.
오는 길에 박 선생에게 들렀다. 나는 “나보다 먼저 말하면 안 되는데 했더군.” 했을 뿐 자세히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는 나와의 통화 직후 김 국장과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했다고 시인했다. 그는 또 앞으로는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미리 말해 달라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래도 풀 수 있는 오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늦게까지 일이 있어 김 국장을 못 만났다. 다음날, 오전에 셋이서 만나 오해를 풀고 싶었다. 내가 한 이야기 중, 김 국장이 전에 나로부터 못 들은 이야기는 거의 없는데, 그가 왜 그렇게 이성을 잃고 앞뒤 없이 나왔는지 궁금했다.
완도신문을 인수하기 전부터 최근까지, 김 국장과 나는 정말 여러 번 만나, 인수를 의논하고 바람직한 신문에 대해 이야기해 온 것이 사실 아닌가? 그렇다면 그에게 전달한 박 선생이 어떤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전달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꼭꼭 찌르는 듯한 말투까지 곁들였다면 상당한 충격을 주었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먼저 박남수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차례 오래 신호를 보내도 받지 않았다.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김 국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나와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내가 화를 냈다. 김 국장에 대한 나의 신뢰 때문에 일단 한 번은 만나 해명해야겠다고 했다. 박 선생이 전화를 안 받으니 김 국장이 전화해 나오게 해서 같이 만나자고 했다. 그는 오후에 보자고 했다. 그러나 오후에 내가 전화하자 그는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으며,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화가 나서 10여 분 소리쳤다. 나는 내가 만약 신문을 만든다면 그렇게 한다고 했지, 당장 신문을 내겠다고 말한 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알았다며 한 번 보자고 했다. 그러나 그 후 그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나 역시, 글 싣는 것에 환장하여 완도신문에 목 맨 사람도 아니므로, 한참 후배인 그에게 더 이상 만나달라고 매달릴 수는 없었다.
얼마 후 완도신문에 박 남수 선생의 칼럼 “다 망해가는데 혼자만 성공한 사람은???”이 “장보고”라는 필명으로 실렸다. 김 국장과 박 선생은 서로 굳건한 신뢰관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완도에 돌아온 이래, 완도신문 김정호 편집국장과 그 누구보다도 많은 시간을 함께하면서 열정적으로 완도의 현안과 미래에 대해 의견을 나눠왔다.
김정호 편집국장은 내가 아는 완도의 그 누구보다도 솔직한 사람이다. 그래서 때로 의견이 달라 격론을 벌이면서도, 사실 나의 속내는 항상 편안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소통’이 가능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그와 가는 길이 달라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는 최근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서슴없이, 내가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때문에 밑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여전히 나는 그가 진심을 숨기거나 거짓말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지금도 그가 솔직하고 완도의 현안과 미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며, 그 때문에 많은 희생을 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는 좋은 추억을 공유한 후배인 그의 발언에 대해 사적인 감정은 없으며 그의 의견을 존중한다. 다만 그는 군민의 ‘공기’인 완도신문의 편집국장이자 사실상의 사장으로서 '공인'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공개적으로 김 국장에게, 그가 평소에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정론직필’을 적용하려고 한다.
완도신문은, 군민의 모금에 의해 태동한 ‘군민의 신문’으로서 너무도 자랑스러운 우리 모두의 자산이다. 그러나 지금 보기에 ‘군민의 신문’으로서 완도신문의 소유권은 증발해 버리고 없다. 또한 ‘군민의 이익’의 관점에서 볼 때, 김 국장이 근년 들어 완도신문을 운영하는 방식은 매우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1. 최근의 ‘소란’에 대해
최근 나, 김정호 국장, 박남수 선생(영어공부방 다선서원; 필명 장보고) 사이에 소란이 있었다. 그 전말은 대강 이렇다.
지난 6월 20일 쯤 나는 김정호 국장을 만나 무보수로 완도신문에 들어가 일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지역의 경제/정치/사회적 상황이 더욱 어려워지고, 또한 지역의 국회의원 선거구가 바뀌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완도신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인식하였다.
군 집행부와 새로운 국회의원이 군민의 이익을 제대로 추구하도록 견제하고, 광역 NGO 활동을 통해 해남군과 같은 큰 지역과 경쟁하며 우리 지역의 이익을 대표/대변할 수 있는 도구로서 완도신문의 가치에 새삼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군민의 신문’인 완도신문의 영향력을 획기적으로 제고하여, 대내적으로든 대외적으로든 무시당하지 않는 시민세력의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느꼈다. 그래야 실질적 견제가 가능하고 지리멸렬한 시민세력을 묶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런데 나는 평소의 대화를 통해, 김 국장이 늘 신문사 운영자금 고민과 함께 양질의 인력에 대한 갈망과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물론 나와 그의 관점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예를 들면, 광주-완도고속도로, 장보고기념관, 해변공원 등에 대한 견해가 매우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 국장에게 무보수로 들어가 일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취재-특히 기획/심층 취재와 인터뷰-와 편집/교열에서 내가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이는 경영개선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날 우리는 개인적 관심, 완도의 현안, 신문 등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밤을 꼬박 샜다. 그는 나의 제안에 대해, 제대로 일을 하려면 무보수로 하면 안 되고 정식으로 계약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단한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 후 10여일이 지나도록 김 국장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나는 바쁜가 보다 했다가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곰곰 생각해 보았다. 말은 못 하지만 ‘거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래 사설도 주로 A씨가 쓰는 것 같고, 편집부 ‘팀장’으로 박 남수 선생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그의 말을 떠올리면서, 내가 ‘계륵’같은 제안을 하여 곤혹스럽게 한 것 같아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상황이 어려운 것 같은 박 선생이 정식으로 채용되어서 장차 편집을 전담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취재하고 글 쓰는 일에 대해 자신이 ‘프로’라고 하면서 모모 기자 두 사람 10배 몫은 할 수 있다고 자신한 적도 있었다.
완도신문의 역할 중에는, 지역의 진보적 시각을 가진 젊은 사람들을 고용하여 지역을 떠나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여기에 박 선생도 해당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제안을 어떻게 철회하면 모양이 좋을까 의논하려고, 6월 30일 오전 박 남수 선생에게 모처럼 전화를 했다. 그리고 김 국장에게 제안한 것을 대략 이야기 했다.
그런데 박 선생(그와 나는 10년 이상 차이 난다)은 좀 삐딱(?)하게 나왔다. 내가 사장이나 편집국장 자리를 미리 가정하고 제안한 것 아닌가 하는 투로 나의 의중을 탐색하듯 찔러댔다. 좀 불쾌했지만, 성의껏 그날의 대화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바람직한 지역신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 역시 김정호 편집국장 못지않게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꿈 이야기를 할 때는 다소 오버할 때도 있다.
게다가 박 선생이, “여러 신문들이 경쟁을 해야 지역이 발전한다”면서, 뭔가 정보를 캐내려고 자꾸 찔러보는 것 같아 일부러, 내가 한다면 이런 신문을 만들거라는 이야기를 자세히 말하게 되었다. “완도신문의 운영방식이 변할 것 같지는 않아. 나는 기회가 온다면 이런 신문을 내서 완도신문과 경쟁하고 자극을 주고 싶어. 그리고 양심세력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싶네.”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완도신문을 주식회사로 전환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민주화 세력, 섬 주민 등 군민들의 모금으로 출발한 완도신문이 가지는 상징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이상의 이야기는 모두 내가 김 국장에게 오래 전부터 해 온 내용이다.)
박 선생은, 김 국장이 이경국 사장으로부터 완도신문을 인수받은 이후에는 ‘군민 출자’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완전히 김정호 국장의 소유라고 했다.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또한 박 선생은, 만약 나라면 현재 완도신문의 두 기자와 자기 중 어느 쪽을 고용하겠는지 물었다. 나는 그가 자신을 ‘프로’라고 자부했기 때문에, 내가 김정호 국장이라면 먼저 박 선생을 고용할 거라고 말했다.
얘기하다보니 내가 너무 확신에 차 있어서-돈 얘기는 빼놓고(나는 지금도 신문 찍는 데 한 번에 몇 부 찍고 한 번에 얼마 드는지 모른다. 누구에게 들었을 수도 있지만 거기까지는 관심이 없어서인지 기억에 없다.)-박 선생이 내가 곧 신문 찍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그랬다. “생각이 그 정도라면 꼭 신문을 내셔야겠네요.” 내가 자본이 없다고 하자 박 선생은 “피 묻지 않은 자본이 어디 있습니까? 자본은 가리지 마세요.” 했다. 나는 “자네 말도 그럴듯하군.” 하고 웃어 주었다.
작년에 누가 나에게, 몇 사람 출자하여 신문 내자는 사람이 있었다. 그 때 내가 답했다. “내가 친한 정호가 하고 있기 때문에 못 한다. 나중에 혹 정호가 망하기라고 하면 모를까.”
얼마 후 보니 김 국장도 다른 경로로 이 내용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 후 내가 이 얘기를 박 선생에게도 했다. 그는 그 때도 그랬다. “신문은 자꾸 만들어서 경쟁해야 합니다. 저도 도울 수 있습니다.”
같은 날 오후에 김 국장을 만나 제안을 철회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완도신문에 들어가지 않고 또 멀리 가지도 않으면서 이따금 이슈에 따라 칼럼을 지원해 주는 게 자네에게 가장 바람직 할 것 같네.”
그랬더니, 이야기 들었다고 하면서 “저는 정말 치밀합니다. W나 C 신문은 사실 제가 그냥 놔두면서 적당히 이용하고 있습니다. 두 신문이 너무 형편없어서 우리 신문이 좀 못 해도 오히려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님이 신문을 낸다면 방향성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인신공격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구독을 못 하게 하고 광고를 못 하게 압력을 가하여 죽이겠습니다. 어차피 경쟁 아닙니까?”
“그리고 군민신문, 주식회사 이야기는 왜 합니까? 그리고 우리 새*끼들(기자들) 무시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이랬다. 아니 무슨 신문이 곧 나온다고? 나는 기가 막혔다. 그리고 신문이 설사 나온다 하더라도, 자기 말로도 방향성이 같은데, 저와 나 사이에 인신공격을 포함해야 하나? 이런 게 자칭 ‘진보주의자’ 김정호의 경쟁인가?
저 친구가 내가 알던 ‘진보’ 김정호 맞나? 내가 좀 벙벙해 있는 사이에 A씨가 들어왔다. 둘 사이에 선약이 있는 것 같아 별 도리 없이 일단 나왔다.
오는 길에 박 선생에게 들렀다. 나는 “나보다 먼저 말하면 안 되는데 했더군.” 했을 뿐 자세히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는 나와의 통화 직후 김 국장과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했다고 시인했다. 그는 또 앞으로는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미리 말해 달라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래도 풀 수 있는 오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늦게까지 일이 있어 김 국장을 못 만났다. 다음날, 오전에 셋이서 만나 오해를 풀고 싶었다. 내가 한 이야기 중, 김 국장이 전에 나로부터 못 들은 이야기는 거의 없는데, 그가 왜 그렇게 이성을 잃고 앞뒤 없이 나왔는지 궁금했다.
완도신문을 인수하기 전부터 최근까지, 김 국장과 나는 정말 여러 번 만나, 인수를 의논하고 바람직한 신문에 대해 이야기해 온 것이 사실 아닌가? 그렇다면 그에게 전달한 박 선생이 어떤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전달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꼭꼭 찌르는 듯한 말투까지 곁들였다면 상당한 충격을 주었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먼저 박남수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차례 오래 신호를 보내도 받지 않았다.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김 국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나와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내가 화를 냈다. 김 국장에 대한 나의 신뢰 때문에 일단 한 번은 만나 해명해야겠다고 했다. 박 선생이 전화를 안 받으니 김 국장이 전화해 나오게 해서 같이 만나자고 했다. 그는 오후에 보자고 했다. 그러나 오후에 내가 전화하자 그는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으며,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화가 나서 10여 분 소리쳤다. 나는 내가 만약 신문을 만든다면 그렇게 한다고 했지, 당장 신문을 내겠다고 말한 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알았다며 한 번 보자고 했다. 그러나 그 후 그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나 역시, 글 싣는 것에 환장하여 완도신문에 목 맨 사람도 아니므로, 한참 후배인 그에게 더 이상 만나달라고 매달릴 수는 없었다.
얼마 후 완도신문에 박 남수 선생의 칼럼 “다 망해가는데 혼자만 성공한 사람은???”이 “장보고”라는 필명으로 실렸다. 김 국장과 박 선생은 서로 굳건한 신뢰관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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