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칼럼] ‘인기 있는 노조’가 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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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노자(펌) 작성일08-08-29 04:14 조회4,69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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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인기 있는 노조’가 되기 위하여
[한겨레신문] 2008년 08월 27일(수) 오후 08:39
필자가 여름마다 국내에 머무를 때 전교조 교사들에게 자주 강의를 한다. “한국의 교사 조합에서 강의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오슬로대 동료들에게 할 때에 “교사 노동자들과 지식과 의견을 공유하는 게 존경스럽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노르웨이에서, 각종 교직원 노조의 회원 수는 14만명, 곧 교육 부문 노동자의 절대 대다수다. 사회적 신뢰도가 높은 교사 조직인 만큼 거기에서 강의를 하는 것도 ‘존경 받는 일’로 치부된다. 그러나 국내에서 “전교조 강의를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욕 듣기 일쑤다. 교수부터 택시 운전기사까지 전교조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 것을 거의 매일 볼 수 있었다. 노르웨이보다 조직률이 세 배 이상 낮은데다 노르웨이와 달리 파업권조차도 없는 전교조도 증오를 받는 경우가 많지만 파업까지 하는 노조라면 더욱더 그렇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각대로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진정한 사회적 변혁의 시발점으로 인식하는 필자와 같은 사람에게는 마음 아픈 일이지만 국내에서 규모가 작은 국지적 파업들은 보통 대중적 관심을 끌지 못한 채 고립되는가 하면, 규모가 큰 부문별 파업, 예컨대 공무원 파업 등은 많은 경우에는 대중 다수의 적대적 반응에 부닥치곤 한다. 노조, 파업에 대한 거의 다수 영세서민들의 적대감의 원인, 곧 노동운동 고립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노동 운동이 인기를 얻지 못하는 이유’를 노조 활동가에게 물으면 “조·중·동에 의한 세뇌”를 자주들 거론하곤 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의 보수·극우 신문들이 노조나 파업에 대해 보이는 적대성을, 예컨대 유럽의 보수 매체에서는 발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과연 매체의 소비자들은 매체가 전해 주는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만 하는 ‘로봇’들인가? 만약 보수 매체들의 왜곡이 대중들에게 먹혀 든다면 또 그럴 만한 사회·심리적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온갖 격차들이 심하고, 공정한 경쟁이란 불가능한 한국 사회에서는 노조뿐만 아니라 연고 집단의 범위를 넘어서는 그 어떤 조직도 대중적 신뢰를 받기가 어렵다.
‘우리’와 무관한 ‘남’을, 한국인들은 잘 믿어주지 않는다. 정부 신뢰도도 세계 최하인 11.3%밖에 안 되고 ‘다수 정치인들이 부패됐다’고 보는 이들도 82% 정도지만,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이기적이다’라고 보는 이들도 56.5%나 된다. 노조 가입률이 최근에 9% 안팎이 되어 활동가 사이에서 위기 의식이 고조돼 있지만 정당 가입률(7%)이나 인권·구호 등 각종 시민단체 가입률(11%)도 꽤나 낮은 수준이다. ‘가족’ 코드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연고에 기반을 두지 않는 조직 활동은 뿌리 내리기 어렵다. 또, 커다란 혈연 집단인 ‘민족’의 대표자임을 내세우며 ‘경제 성장’을 약속함으로써 민심을 잡을 수 있는 국가와 달리, 노조가 하는 일들은 비조합원들에게 순전히 ‘남의 일’로 비치어 냉대받기 십상이다. 그리고 파업과 같이, 일부 일반인들에게 불편을 끼칠 수도 있는 일을 벌이게 되면 그 냉대가 곧 적대성으로 이어진다.
연고집단별로 조직돼 있는 이 사회에서는 노조 활동의 대중화는 어렵고, 노조의 사회적 고립화는 쉽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규직 노조들부터 비정규직의 가입을 장려하고 비정규직의 문제로 적극적으로 싸우는 등 공공·공익적 역할을 맡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노조 활동의 공익성, 연대성이 비조합원의 눈에 띌 만큼 가시적이게 되면 노조를 보는 시각도 꼭 달라지리라 믿는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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