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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김 갑 천 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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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경국폄 작성일08-10-08 09:37 조회3,98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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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김 갑 천 박사님!!
김갑천 박사를 양식과 인격을 갖춘 식자로 알고 존경해 왔던 이경국 입니다.
당신처럼 서울대학원에서 수학하여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도 드문 일로서 완도의 자랑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인터넷상의 당신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완도 지역사회를 갈등과 반목으로 몰아가고자 하는듯이 보여 한심하고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요즘 당신이 올린 글들을 보면 공적인 입장이 아니라 사적인 입장에서 여과 없이 올린 글들로 보입니다. 나는 당신의 평소 생각과 인격이 그대로 담겨있는 글들을 보며. 제대로 알고 글을 올리라는 당부를 하기 위하여 직접 만나 그동안 완도신문이 지나온 과정을 설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완도신문 관련 당사자인 내말은 안중에도 없이 김 박사의 개인감정으로 대중매체에 글을 올림으로써 사회적물의가 크다고 생각하여 말 돌릴 것 없이 직접 나서서 사실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글 중에 선현들의 항일운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완도사람으로서 긍지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토록 자랑스러운 우리 고장 역사를 담아 보전하고자 한 “완도군 항일운동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편찬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 중 사단법인 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에 돈이 없다는 둥 여러 이유를 대며. 중도에 편집위원을 사퇴해버렸습니다. 이러한 당신의 무책임하고 반 완도적인 행위는 정당한 처사였는지 묻습니다.

완도신문 김정호 편집국장이 당신의 뜻을 모두 인정하지도 않고 받들지 않으며. 칼럼을 계속 싣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완도신문을 비방하는 당신이 정말 지식인인지. 지성인인지 안타깝습니다.
나는 완도 신문에서 손을 뗀지 2년이 지났어도 칼럼한번 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후임 경영자인 김정호 편집국장에게 부담을 줄 수 없어서입니다.

당신이 완도신문에 올린 칼럼 중에 ̋완도를 제주도 특별자치구에 합병해야 한다.̋는 논리가 진정 맞다. 라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생일도 백운산을 헐어내어 건설골재로 사용하고 그곳에 잔디 광장 등 관광 시설을 건설하자는 논리가 양식 있고. 양심 있는 지역사회 젊은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백운산을 파괴해 건설골재로 사용한다면 향후 50여년을 채취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강산을 가장 아름답게 보존하는데 앞장서야 할 젊은 식자의 의견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는지?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글을 완도신문에 게재 하겠다는 당신의 발상이 황당합니다. 장보고의 이름으로 올린 글에 대한 컴플렉스가 아닌가하는 의구심까지 듭니다. 그리고 양심적이라면 당신의 학력을 정확하게 밝혀야 할 것입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을 뿐 대학은 서울대학이 아닌 걸로 알고 있음으로 당신이 졸업한 대학도 기제 함으로 당신의 학력을 평가할 수 있고 당신의 의견을 정당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신에게 전했던 완도신문의 창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하게 밝히겠습니다.

완도신문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말미암아 1987년 6,29선언이 있었고 언론자유가 보장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국 곳곳에서 지역신문창간이 줄을 이었습니다.
1989년 충남홍성신문의 최초발행을 시작으로 전남에서는 영광신문과 옥당신문이 같은 지역에서 동시 창간되었다가 2개월 만에 중단되었고, 1990년 목포신문과 해남신문에 이어 완도신문이 창간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7~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6,29선언을 얻어 냈듯이 90년대 지방자치를 앞두고 해야 할 일로 지역신문을 발행하여 지역민의 정서와 인정을 하나로 묶어 완도군민을 통합하고, 함께 잘사는 행복한 고장으로 가야 했기에 과감하게 시도하였습니다.

지역주민의 지역신문 참여를 높이고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발행을 위하여 지역마다 지역주민공모주 형태로 출발했습니다. 대표적으로 해남신문이 YMCA, 농민회, 전교조 등 550명의 주주가 참여하였습니다.
우리도 완도군민의 뜻을 모으고자 1990년 3월 21일 구 교육청(현도서관)에서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발기인 대회를 가졌습니다.
이 모임에서 제가 창간준비위원장을 위임받았습니다, 이후 군민공모주를 모집하면서 문화관광부에 등록증 신청을 하여 1990년 6월 1일 그토록 받기 어려운 발행등록증을 교부받았습니다.
초창기 전국적으로 지역신문에 대한 노하우가 없는 상황에서 본격적인 창간준비에 나선 완도신문은 기자 등 직원을 10여 명이나 채용하여 인건비 등 지출이 너무 많아 운영상에 많은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여러 문제로 그동안 청약된 모금액 1천여만 원을 운영비로 전환하기 위하여 발기인 회의를 거쳐 1990년 9월8일 역사적인 완도신문을 창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식청약은 서정창 전 도의원과 여러분의 노력으로 1만주(5천만 원) 중 2천여 주(1천여만 원) 20%정도의 주식이 모금되어 법인설립을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완도신문을 책임진 발행인이자 대표로서 집을 저당하고 사체를 끌어 모아도 신문사 운영비가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창간이후 2년 정도 지나서는 기자 등 직원의 월급이 밀리는 일이 잦아 1992년 6월에는 직원들이 ̋부도덕한 사주가 봉급을 안준다.̋ 라는 이유로 야밤에 거리에 대자보를 붙이고 출근하지 않아 8개월 정도의 정간 사태를 가져오게 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관내 기업인, 출향인 여러분을 만나 신문을 살려보려고 백방으로 뛰었지만 지역신문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지역신문의 한계란, 좁은 지역사회에서 잘잘못을 따진다는 자체가 어렵습니다.

지역사회의 공적인 관계를 넘어 개인적인 관계로 신문 한 번 발행하면 뒤 따르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적을 양산하는데 누가 돈 투자하여 지역신문 살리려 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어렵고 힘든 중에도 학문과 언론에 대한 문외한으로서 총대를 메고 무식하고 서툴지만 지역사회의 통합과 올바른 지방자치를 위해 1993년 5월에 혼자서 북치고 나팔 불며. 완도신문을 꿋꿋하게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켜왔습니다.

한 때. 완도군수협의 방만한 경영과 관련하여 조합장을 비판하고 서투른 기법과 어휘로 검찰에 고발당하여 명예훼손으로 구속된 적이 있었습니다.

완도군 수협은 성이 덜 찾는지 주식회사를 설립하겠다는 청약을 무시하고 발행인이 주식대금을 편취 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검찰은 투자자 개인 의사를 일일이 물어 반환을 요구하는 투자자는 환급하고 나머지는 지역신문 발전을 위하여 기부하겠다는 조건으로 수사가 종결되었습니다.
이후 최초투자자들을 위하고 바른 완도신문 발전을 위하여 수많은 노력도 했지만 역시 참다운 언론, 올바른 지방자치를 위하여 투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후 편집국장인 김정호 국장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완도신문 발전을 위해 뒷전에 서 있을 뿐입니다.

김갑천 박사는 완도신문이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 다시 한 번 자세히 돌아보기 바라며. 소액이라도 투자 할 의사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완도군민과 지역발전을 위하여 아는 만큼 지역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 봉사라도 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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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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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균이는 공뭔아녀 신두지가 어디 민공노 데가리맞지 거그가 완도 거시기라고  으메 어짜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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