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빠진 효율은 폐기처분해야 할 사회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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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연합뉴스 작성일11-04-14 09:59 조회2,85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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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비극의 뿌리는 신자유주의의 왜곡된 인간관이다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수재들이 모인 대학에서, 학생들이 경쟁에 시달리다 못해 연이어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은 지금 우리 사회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무엇보다 참담한 것은 경쟁에 지쳐 비극적인 선택을 한 그들 역시 한때는 입시라는 치열한 경쟁의 승자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은 그 누구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없는 '경쟁을 위한, 경쟁에 의한, 경쟁의 나라'가 되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언젠가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검투사처럼 하루하루를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카이스트 학생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주범도,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패배의 낙인을 찍어놓은 주범도, 결국은 한순간의 승리와 덧없는 과실만을 안겨주는 무한 경쟁이라는 폭압의 굴레인 것이다.
경쟁의 광신자들은 경쟁만이 효율을 낳는다고 앵무새처럼 외쳐댄다. 그러나 무엇이 과연 효율이란 말인가. 한 때의 절망으로 수많은 가능성을 지닌 청년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효율인지 되묻고 싶다. 경쟁의 고정된 틀 밖으로는 눈길도 주지 못하고 비판적 정신과 창의성을 닫고, 그저 속도에 파묻힌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효율인가? 아니, 애당초 사람의 삶을 이토록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는 것이 효율이라면, 도대체 그것을 어찌 선이라 하겠는가? 사람의 삶이 빠진 효율은 사람을 도구로 전락시키는 명백한 악이다. 그것은 추구해야 할 덕목이 아니라 마땅히 폐기처분해야 하는 사회악일 뿐이다.
무엇보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들 경쟁 광신자들의 잠재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은 그릇된 인간관이다. 그들이 잘못 설정하는 것처럼 사람은 이윤동기로 움직이는 경제적 로봇이 아니다. 그럼에도, 학생은 더 많은 미래의 보수를 위해서만, 혹은 '징벌적 등록금'을 피하기 위해서만 공부한다고 믿는 왜곡된 시각이 결국 사람의 삶이 빠진 효율을 낳는다. 어찌 비단 학생뿐이겠는가. 카이스트 총장과 똑같은 인간관을 가진 경쟁 광신자들이 강요하는 공직 사회의 개악 역시 마찬가지이다. 학생들에게 징벌적 등록금을 강요하던 그 논리 그대로, 공무원들에게 강제퇴출이라는 협박을 구사한다. 인간을 이윤로봇으로만 여기는 그들이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은 그저 '당근과 채찍'이라는 동물적 수단뿐이다.
'당근과 채찍'이라는 동물적 수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학생들은 진리탐구자로서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공직자는 공익의 봉사자라는 자긍심을 잃어간다. 그저 '퇴출'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삶의 전부가 된다. 결국 경쟁의 광신자들은 우리 모두의 삶을 파탄시키는 거대한 사회악의 주범인 것이다. 이 거대한 우리 시대의 사회악에 우리는 대항해야 한다. 맹목적인 경쟁, 비인간적인 효율이 아닌, 인간을 위한 효율은 살벌한 경쟁이 아닌 관심과 배려에 있음을 경쟁의 광신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수재들이 모인 대학에서, 학생들이 경쟁에 시달리다 못해 연이어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은 지금 우리 사회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무엇보다 참담한 것은 경쟁에 지쳐 비극적인 선택을 한 그들 역시 한때는 입시라는 치열한 경쟁의 승자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은 그 누구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없는 '경쟁을 위한, 경쟁에 의한, 경쟁의 나라'가 되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언젠가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검투사처럼 하루하루를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카이스트 학생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주범도,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패배의 낙인을 찍어놓은 주범도, 결국은 한순간의 승리와 덧없는 과실만을 안겨주는 무한 경쟁이라는 폭압의 굴레인 것이다.
경쟁의 광신자들은 경쟁만이 효율을 낳는다고 앵무새처럼 외쳐댄다. 그러나 무엇이 과연 효율이란 말인가. 한 때의 절망으로 수많은 가능성을 지닌 청년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효율인지 되묻고 싶다. 경쟁의 고정된 틀 밖으로는 눈길도 주지 못하고 비판적 정신과 창의성을 닫고, 그저 속도에 파묻힌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효율인가? 아니, 애당초 사람의 삶을 이토록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는 것이 효율이라면, 도대체 그것을 어찌 선이라 하겠는가? 사람의 삶이 빠진 효율은 사람을 도구로 전락시키는 명백한 악이다. 그것은 추구해야 할 덕목이 아니라 마땅히 폐기처분해야 하는 사회악일 뿐이다.
무엇보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들 경쟁 광신자들의 잠재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은 그릇된 인간관이다. 그들이 잘못 설정하는 것처럼 사람은 이윤동기로 움직이는 경제적 로봇이 아니다. 그럼에도, 학생은 더 많은 미래의 보수를 위해서만, 혹은 '징벌적 등록금'을 피하기 위해서만 공부한다고 믿는 왜곡된 시각이 결국 사람의 삶이 빠진 효율을 낳는다. 어찌 비단 학생뿐이겠는가. 카이스트 총장과 똑같은 인간관을 가진 경쟁 광신자들이 강요하는 공직 사회의 개악 역시 마찬가지이다. 학생들에게 징벌적 등록금을 강요하던 그 논리 그대로, 공무원들에게 강제퇴출이라는 협박을 구사한다. 인간을 이윤로봇으로만 여기는 그들이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은 그저 '당근과 채찍'이라는 동물적 수단뿐이다.
'당근과 채찍'이라는 동물적 수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학생들은 진리탐구자로서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공직자는 공익의 봉사자라는 자긍심을 잃어간다. 그저 '퇴출'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삶의 전부가 된다. 결국 경쟁의 광신자들은 우리 모두의 삶을 파탄시키는 거대한 사회악의 주범인 것이다. 이 거대한 우리 시대의 사회악에 우리는 대항해야 한다. 맹목적인 경쟁, 비인간적인 효율이 아닌, 인간을 위한 효율은 살벌한 경쟁이 아닌 관심과 배려에 있음을 경쟁의 광신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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