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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런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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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상화 작성일13-12-15 02:13 조회2,6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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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런 인간이었다!! 

 


육종관 : 처 10명에 자식이 22명..

친일파로 분류된 자








마을 사람들의 평가가 부정적이었다.


육씨는 옥천 일대에서 육종관씨의 땅을 안 밟고는 못 지나갈 정도로 대지주였고, 사위가 대통령까지 됐지만 마을 사람들의 인심을 얻지 못했다.


 


특히 해방 직후 국가의 토지분배 특별법으로 합법적으로 취득한 소작농들의 땅까지 다시 강탈해 갔다는 비난 여론이 거셌다






(박정희는 첫 처인 김호남, 3년 동거한 이현숙을 거쳐


육영수와 재혼)





[ 육영수의 선친, 친일파 거두 육종관]




출처 : 대구매일신보 '박정희 찬양 시리즈' <청년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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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첫번째 부인 김호남과 결혼생활중


이현란(이현숙)과 3년 동거 에들어간 후 김호남과 이혼.


그후 육영수와 만나 재혼 한다.)


 


<박정희, 육영수 찬양글>


 


육종관은 근면과 성실로 자수성가하여 당대에 만석꾼이 된 입지전적인 사람이었다. 1950년 당시 57세이던 육종관은 보통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두뇌가 비상한 사람이었다. 어릴때 부터 손재주가 뛰어났고, 특히 기계를 만지는데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왜정 때 옥천군내에서 승용차를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던 그는 20대이던 1920년대부터 포드승 용차를 손수운전하고 다녔으며 닛산(日産)화물차도 보유했을 정도였다.


 


그만한 재력가이기 도 했지만 기계류를 뜯고 고치고하는, 기계에 대한 남다른 호승심이 그런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차가 고장이 나도 혼자 만지고 연구하여 고쳐내는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한번은 라디오를 분해해 몰래 주파수를 고쳐 소련방송을 듣다가 고등계형사에게 걸린적도 있었다.


 


당시 만주국 마정국(馬政局)의 과장으로 있던 만주국 고등문관인 맞사위 홍순일(洪淳一.장녀 육인순의 남편.6.25때 납북)과 친구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크게 당할뻔한 일이었다.


 


그는 또 정미소도 소유하고 있어 발동기나 양수기를 혼자 손으로 돌리고 고치곤 했고, 당시로선 귀한 활동 사진기로 자기집의 누에치는 장면을 직접 촬영해 동네사람에게까지 구경 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쩌다 옥천에 순회가극단이 오면 자기집 마당에서 특별공연토록 주선해, 복혜숙이나 백난아 등 당대의 배우들을 직접 접해 본 마을사람들로부터 두고두고 찬탄의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의 주수입은 소작을 주어 얻는 도조와 정미업, 양잠업 등이었다. 농번기가 되면 자신이 앞 장서서 집안 식구들을 독려하며 농사일에 나설 정도로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통키 에 정력적으로 생긴 땅땅한


 


체구의 육종관은 사업에는 근면성실했지만 욕심이 많았고 사생 활도 깨끗하지 못했다.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소작료를 깍아주지 않고 정확히 받아내어, 작인들로부터 원망이 컸다.


 


이바람에 해방이 되었을 때 그도 한번 당할뻔 했으나 아내인 이경령의 음덕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남편의 실인심(失人心)을 대신해 이경령여인이 알게 모르 게 평소 이웃을 다독이고 베풀어온 결과였다.


 


그럼에도 열네살의 어린 나이로 시집을 온 이 경령이 일평생 자신을위해 헌신해 오는것도 아랑곳않고 보란듯이 공공연히 축첩에만 몰두 해온 사람이었다.


 


한창때 그는 모두 여섯명의 소실을 거느리는 기록을 세워 본처인 이경령을 아연케했다. 그 가운데는 일본인여인도 있었고, 두 자매가 함께 소실이 된 '개성집'이란 작은집도 있었다.


 


또 '옥천집' '영광(靈光)집'등으로 불리는 소실도 있었는데, 더러는 서울과 옥천읍내에서 살림을 차리기도 했지만 본처와 한지붕아래에서살때도 많았다.




따라서 본처인 이경령과의 사이에 낳은 1남(육인수.陸仁修.뒷날 국회의원) 3녀(인순.영수.예수)외에 10여명의 서(庶)자녀를 거두는 일도 보통사람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만큼 육종관의 정력이나 재력, 그리고 여성편력이 남달랐음을 방증했다. (박정희ㆍ육영수 찬양글임을 감안해서 보시길)


 


[박정희, 장인에게 소작인 땅 강탈해준자를 대법원장으로]




출처 : okinews.com "50년 묵은 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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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육종관은 자기 땅을 해방후 합법적으로 소유한 소작인들에게 전쟁중 '빨갱이'란 강력한 협박으로 강탈한다.


 


소작인들은 1956년 법원에 소유권 되찾는 승소를 거두나, 육씨 문중은 항소하고 1957년 '소작농들이 소유권을 포기한다'는 "의문의 화의"가 조작되지만, 대법원은 육씨 문중에 승소판정을 내린다. 


 


그런데 이 불법의 '화해조서'를 이끈 조진만 변호사가 5.16 쿠데타 직후인 1961년6월30일 제3대 대법원장으로 전격 임용되어 4대까지 8년간 재직한다는 사실이다.)


 


지난 93년 7월 청와대 민원실과 군수를 상대로 한 진정서가 제출되었다. 이 진정서에는 청성면 능월리 이해준(65)씨를 비롯한 5명의 경작자들이 수십년 전에 잃었던 경작권을 되찾아 달라는, 농민들의 한이 서려 있다. 




이 진정서에서 농민들은 자신들이 해방 후 정부의 토지개혁에 따라 농지개혁법이 시행되면서 대지주였던 고 육종관씨의 토지를 국가로부터 유상분배받았고 토지가격을 5년간 상환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정 다툼에 휘말려 다시 토지를 잃게 되어 소작인으로 떨어지게 된 과정을 담고 있다.


 


특히 재판 진행 과정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들을 제기하고 강권에 의해 토지를 잃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농지개혁법 시행부터 재판으로 토지를 잃기까지 




평생 처음으로 토지를 가졌던 기쁨을 맛보았던아버지 세대가 모두 세상을 떠난 후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땅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1948년 남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토지개혁이 시행된다. 남한에서는 지주에게 3정보까지만 토지 소유를 허용하고(단 종중 명의의 위토-제사를 지내는데 쓰이는 토지는 1기당 600평까지 제외) 유상몰수, 유상분배 원칙을 적용, 국가가 지주로부터 땅을 사서 경작인들에게 되파는 과정을 거쳤다. 땅을 분배받은 농민들은 연수확량의 150%를 5년간 상환하도록 했다. 




일제 때부터 지주인 육종관씨의 농경지를 소작했던 청성면 능월리 농민들도 그때 땅을 분배받게 되었고 5년이면 자기 땅이 된다는 기쁨 때문에 열심히 상환액을 갚았다.


 


그래서 일부는 1954년에, 일부는 1955년에 자기 땅이라는 등기문서를 손에 쥐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지주 측인 육종관씨의 재판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판을 위한 준비는 이들 농민들이 상환액을 같는 도중인 1953년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주민들은 전쟁 중인 이 시기에 지주 측 사람들이 마을로 찾아와 소작인들을 협박하면서 백지에 도장을 찍어줄 것을 요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주 측의 협박에 못이겨 도장을 찍어주었다는 얘기다. 




지주 측에서 도장을 찍으라는 요구의 근거는 정부가 토지분배를 시행한 토지가 선대로부터 내려온 위토(제사를 지내기 위해 관리하는 땅)라는 이유였다. 문제의 토지는 능월리 135-2 토지 등 10여 농가에 달한다. 




나중에 재판 과정까지 간 농민들은 9농가 10필지였다. 지난 93년 정부와 군수에게 진정서를 제출한 농민은 5농가. 이 토지는 육신영씨를 비롯해 육종관씨의 아들인 육인수씨 등 5∼6명 공동명의로 등기되어 있었다.


 


농민들은 지주 측의 요구를 거절하며 반발했다. 또 지주 측 사람들이 올 때면 마을을 피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지주 측은 당시 전쟁 상황에서 카빈총까지 메고 와서 위협하는가 하면 도장을 찍지 않으면 경찰서에 가두겠다고 협박도 했다는 게 주민들의 주장이다. 진정서를 제출한 주요 인사인 이해준씨나 최정환씨 등도 지주들의 협박 현장을 본 목격자다. 




▶갖은 협박이 백지에 도장을 찍게 한 요인이다 




특히 지주 측은 당시 능월리 사람들 가운데 인민군에 의해 징용된 의용군이 나온 가정들과 피난을 가지 않아 인민군의 부역 요구를 어쩔 수 없이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주요 대상으로 했다는게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 




`빨갱이'라면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었던 당시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면 지주 측의 자식이나 가족 중에 의용군이 있는 곳에 갔던 가정이나 인민군 부역사실이 있는 주민들을 상대로 한 경찰서에 가두겠다는 위협은 순진한 농민들에게는 가장 큰 위협수단이었다. 




이 백지에 찍은 도장은 지주 측이 1954년 청주지방법원에 `포기증서 확인청구소송'의 증거로 활용된다. 주민들은 백지에 도장을 찍었을 뿐 포기각서에 도장을 찍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소송에서 청주지방법원은 농민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청주지법은 당시 농민들이 분배받았던 토지가 지주인 육씨 문중의 위토라 해도 농민들의 상환이 끝나기 전까지는 당연히 소유권이 국가에 있다며 경작자들이 얻은 분배권을 지주에게 반환했다 해도 분배권자인 국가에 반환했어야 한다는 점을 들어 경작자들이 1심에서 이기는 작은 기적을 낳았다. 1956년의 일. 




▶1심 승소, 그러나 사기에 휘말려 2심에서




그러나 이에 불복한 육씨 문중에서는 고등법원에 항소를 제기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고등법원 계류 중에 한 가지 변수가 생겼다. 1957년 항소한 원고 측인 육씨 문중과 피고 측인 경작자 사이에 느닷없는 화해가 성립된 것.


 


이때 원고 측의 변호사는 조진만씨. 경작인들의 대리인은 마을 주민의 한 사람인 김상윤이라는 사람이었다. 




김상윤씨는 마을에 살면서 글도 제대로 모르는 경작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대신 소송을 알아봐 준다며 경작인들로부터 도장을 받아갔고 그 도장은 화해조서를 작성하는데 사용되었다. 




화해조서에는 이 토지를 육씨의 위토임을 확인하고 경작자 명의의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말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결국 경작자들이 어렵게 분배받은 토지의 소유권을 지주에게 돌려주고 별도 협정에 의한 제수의 납부를 이행하지 않거나 기타 배신행위가 없는 한 토지의 소작권을 박탈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경작인들의 대리인으로 화해조서를 작성한 김상윤이라는 사람에 있다. 경작자들은 날벼락같은 화해 소식에 대응조차 못한 채 김씨가 마을에서 달아난 후에야 진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김씨는 변호사 자격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대리인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는 화해조서가 그대로 인정되었다는 점을 경작인들은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다. 




▶부당한 화해조서로 인해 땅 잃고 소작인으로 




더구나 1심에서 승소한 경작인들이 화해를 통해 지주에게 토지 소유권을 되돌려 주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터다.


 


이에 경작인들은 대리인의 자격을 문제삼아 사기라며 대법원에 `화해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한다. 그러나 1962년 대법원에서는 고등법원에서의 화해조서를 그대로 인정, 패소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지주 측의 변호를 맡아 고등법원에서 지주와 경작인들의 화해조서 작성을 이끌어냈던 조진만 변호사가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난 후인 1961년 6월30일자로 제3대 대법원장으로 전격 임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진만씨는 이후 68년까지 3, 4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경작인들은 이처럼 지주 측의 변호사가 대법원장으로 발탁된 것에서 보듯이 절대권력의 힘 앞에 제 소리 한 번 낼 수 없는 분위기에서 어쩔 수 없는 확정 판결을 받고 땅을 잃었다는 주장이다. 




경작인들은 또 자신들이 잃은 토지가 육씨 문중에서는 위토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종중토지 목록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위토가 있는 상황에서 법에 규정된 대로 1기당 600평이 넘는 면적은 경작자에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경작인 토지 상환액은 왜 안돌려주나 




경작인들은 육씨 문중이 일단 재판에서 승소한 점을 인정한다 해도 토지 분배를 받기 위해 국가에 상환했던 토지 상환액조차 여지껏 돌려 받지 못하고 있다. 토지상환을 위해 고픈 배를 더욱 움켜쥐어야 했던 주민들의 아픔이 더욱 가중되는 현실이다. 




이제 이 토지 분쟁 사건은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난 지도 38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러나 지금도 경작인들은 어디에도 호소할 곳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진정서란 이름으로 문을 두드려 보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다.


 


대를 잇는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경작자들은 매년 소작료를 줄 때에 마음이 가장 아프다. 자신의 토지를 자신의 명의로 등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매년 소작료까지 내야 하는 현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소작료를 낼 때가 가장 마음이 아파요. 내 땅에 농사지어 소작료를 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한겨레] 육영수 생가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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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군은 옥천읍 교동리 고 육영수 여사의 생가를 2007년까지 복원할 계획이라고 19일 밝혔다.


 


군은 2007년까지 90억원을 들여 충북도 지방기념물 제123인 육 여사 생가 터 9181㎡에 안채(150.9㎡)와 사랑채(84.1㎡)등 건물 7채와 연못, 정자 등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할 계획이다. 




주변에 육 여사의 유업을 이어 받은 육영재단 관련 자료와 생전의 활동을 담은 사진과 유물 등을 보관할 기념관과 주차장 등 편의시설도 갖춰 주요 관광지로 개발할 방침이다.


 


생가터 지표조사와 종합 정비계획을 세운 군은 8월까지 설계를 한 뒤 올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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