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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를 다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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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두환 작성일06-05-26 10:30 조회6,1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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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데타
'오늘 새벽 군사 쿠데타.'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 당일 [조선일보]가 발행한 호외의 제   목이다. 4월 혁명으로 출범한 제 2공화국은 채 1년도 안되어 5.16 군사 쿠데타로 주저 앉고 말았다. 이에 따라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준 4월 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 버렸다. 

 4월 혁명으로 집권하게 된 민주당은 오랜 희망이었던 내각책임제의 정치 구도 속에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 체제로 출범했다. 그러나 실권 없는 대통령과 총리 사이에는 갈등과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구파 출신인 윤보선은 신파 출신인 장면을 사사건건 견제하려 들었고 장면 내각의 도산을 획책하기도 했다. 
 또한 민주당 정권은 어려운 민생은 돌보지 않은 채 구태의연한 신·구파간 정쟁만 일삼아 새로이 변화된 면모를 기대했던 국민의 여망을 채워 주지 못했다. 그리고 학생들을 비롯한 각계의 시위가 연일 끊이지 않아 사회가 극히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전쟁 후 미국의 지원을 받아 비약적으로 성장한 군부 내 엘리트들의 궐기를 촉발하도록 자극하였다. 당시 군부 내에서는 이러한 시대상황을 두고 만주군 출신 장교 등 몇몇 집단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쿠데타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박정희 소장과 그의 조카 사위인 김종필 중령을 중심으로 하는 장교 250여 명과 사병 3,500여 명이 중심이 된 쿠데타군은 5월 16일 새벽 3시경 한강 어귀에 진입하여 약간의 총격전 끝에 서울 입성에 성공했다. 이들 쿠데타군은 중앙청 및 서울 중앙 방송국 등 목표 지점을 일제히 점거하고, 5시 첫 방송을 통해 거사의 명분을 밝히는 한편 6개항의 혁명공약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5.16 혁명 공약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 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 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 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 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 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 경제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뒤이어 9시에는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령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오후 7시를 기해 장면 정권을 인수한다고 발표하였다. 거사후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 장군은 쿠데타 반대 성명을 발표하면서 강제 진압의 의사를 밝혔으나 윤보선 대통령이 "올 것이 왔다"고 군사 쿠데타의 필연성을 인정, 반란군에 승복하면서 매그루더 장군의 쿠데타 저지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쿠데타는 기정 사실화됐다. 한편 피신해 있던 장면 총리는 18일 은신처에서 나와 국무회의를 열고 내각 총사퇴와 군사혁명위원회에 정권 이양을 의결했으며, 윤보선 대통령은 국무회의의 결정을 그대로 재가했다. 같은 날 미 국무성도 한국 군사혁명위원회의 지도자가 반공친미적임을 지적하면서 쿠데타를 사실상 승인하여 쿠데타  의 성공은 최종 확정되었다. 
 쿠데타군은 최고 권력기구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의장에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장도영, 부의장은 쿠데타의 실질적 지도자인 박정희를 선임했다. 그리고 5월 18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산하에 7개 분과위원회를 두어 본격적인 군정에 들어갔다. 이들은 '반공 구국' 등의 혁명 공약을 실천한다는 명분 하에 혁신·민주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3.15 부정 선거와 관련하여 내무 장관 최인규, 발포 책임자 곽영주, 정치 깡패 이정재, 임화수 등을 처단했다. 

 그러나 그 후 쿠데타 세력간에는 정권의 장악이 확실해지면서 내부의 권력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먼저 5.16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박정희는 5.16군사쿠데타의 얼굴 마담이었던 장도영을 몰아내고  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박정희 세력은 7월 3일 장도영과 쿠데타의 핵심이었던 육사 5기 출신의 박치옥· 문재준 등이 반혁명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체포하고 김종필 계열의 육사 8기들이 권력의 핵심을 장악했다.)  군정기간

동안 적발된 반혁명 사건이 13건에 달했고, 최고회의에 흡수되었던 최고위원 장성들의 상당수가 관련혐의로 제거되어 63년 2월 최고회의에는 발족 당시 32명 위원 가운데 6명만 남을 정도의 치열한 숙청이 단행되었다.

<뒷 이야기 1> 4·19 그리고 김종필 

<조선만평  98년 4월 20일>


<뒷이야기2>

5.16과 유행5.16쿠데타는 유행어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가장 큰 바람을 불러 일으킨 것이 아마도 "재건"일 것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건국민운동, 국가경제재건운동에서처럼 단체 이름이나 구호에서 "재건"이라는 말은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되었다. "재건합시다"라는 인사말이 나오는가하면 옷을 간편한 복장으로 만들어 "재건복"이라고 하였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돈 안들이며 걸어다니는 "재건 데이트"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재건" 속에 뒤섞여 "무허가 건축"도 유행하였다. 그 말은 '못 생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당시 판자 집 같은 무허가 건축이 즐비한 데서 유래한다.

<뒷이야기3> '박정희 = 노란 샤쓰의 사나이'????
노오란 샤쓰입은  / 말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 / 어쩐지 나는 좋아
미남은 아니지만 / 씩씩한 생김 생김
그이가 나는 좋아 / 어쩐지 맘이 쏠려
아 아 야릇한 마음 / 처음 느껴 본 기분
아 아 그이도 나를 좋아하고 계실까.... 

손석우가 작사 작곡하고 한명숙이 부른 <노란 샤쓰의 사나이>(1961)가 수록된 앨범은 레코드점에 깔린지 얼마되지 않아 회수되는 수난을 겪었다. 무명가수가 부른 노래여서 별 볼일 없다는 것이 회수 이유였다. 이처럼 태어나자 마자 죽을 뻔한 <노란 &#49968;쓰의 사나이>가 다시 살아난 것은 뜻밖에 5.16군사쿠데타 덕분이었다.  박정희 육군 소장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국가를 통솔하면서 KBS는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에 의기 소침해진 국민들의 사기와 의욕을 부추기기 위해 밝고 활기찬 노래를 의도적으로 틀어댔다. 그중의 하나가 <노란 &#49968;쓰의 사나이>였던 것이다. 트위스트 리듬에 경쾌하기 이를데 없는 이 노래는 1963년 '새마을 노래'가 나오기 전까지 정부의 대 국민 홍보용 노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회수돼 창고에 쌓여있던 앨범들이 다시 빛을 보게된 건 당연한 일. 당시 레코드 판매점에서는 앨범만 판 것이 아니라 노란 셔츠까지 파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 노란셔츠는 당시 남성 패션의 유행을 주도했다.

<새마을 노래> ( 박정희 작사 작곡 1963)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 알뜰살뜰 다듬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서로서로 도와서 땀흘려서 일하고 소득증대 힘써서 / 부자마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우리 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 새 조국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뒷이야기4> 그는 누구인가?
1944년 일본 육사를 졸업하면서 일본제국의 육군 장교에 임관된 박정희(다카기 마사오 高木正雄) 소위는 만주에 주둔한 관동군 산하 제 8군단에 배속되었다가 일본군의 특수부대인 '철석부대'요원으로 차출되어 항일 게릴라 토벌 작전에 투입되었다.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1년 6개월동안 박정희는 전후 110회에 걸쳐 항일 게릴라 토벌 작전에 참가한 것이다. 임관 1년 만에 중위로 진급하고 소대장이 된 것은 토벌 작전의 '전과'때문이었다. 비슷한 무렵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 장교로 활동했던 그는 "박정희란 사람은 일제시대에 독립군과 싸운 일제만주군의 일원이었으며 나는 그걸 똑똑히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박정희 만큼은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대통령을 시켜서는 안될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줄곧 박정희에 맞섰다. 그는 <사상계>를 만들어 비판적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했으며 '재야의 대통령'이라고도 불렸다. 1975년 3.1구국선언등 유신체제에 저항하다가 그해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 계곡에서 57세의 나이로 의문사하였다.  그는?  (               )

제 3공화국

 군사 정부는 1962년 11월 민정 이양을 위한 헌법 개정안을 국가재건 최고회의에서 의결한 후, 12월 17일 국민투표를 통해 이를 확정했다. 79%의 찬성을 얻어 확정된 이 헌법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반대파 숙청을 거듭한 끝에 명실 상부한 실력자로 등장하여 본격적으로 민정 참여의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63년 2월  이른바 '민정 불참'을 선언한 바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3월 16일 "현시국은 과도적 군정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4년간 군정 연장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며, 민정불참 선언을 뒤집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박정희의 4.8성명이 나오게 되어 그의 민정참여는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박정희는 8월 30일 전역식에서 "이 나라에서 다시는 나와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고 후배군인들에게 말하고 본격적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제 5대 대선 출마 위한 전역- 전역사>
지난 날 수십만 전우들의 선혈로써 겨레를  지켜온 조국의 전선, 초연은 사라지고 오늘은 초목에 싸인 채 원한의 넋이 잠들은 산야, 이 전선에 본인 군을 떠나는 마지막 고별의 인사를 드리려 찾아왔습니다. 여기 저 능선과 이 계곡에서 미처 피기도 전에 사라져간 전우들의 영전에 삼가 머리를 숙이고 십여년을 포연의 진지에서 조국방위를 위하여 젊은 청춘을 바쳤던 그날을 회상하면서 오늘 본인은 나의 무상한 반생(半生)을 함께 지녀온 군복을 벗을까합니다......본인은 군사혁명을 일으킨 한 책임자로서 이 중대한 시기에 처하여 일으킨 혁명의 결말을 맺어야 할 역사적 책임을 통감하면서 혁명의 악순환이 없는 조국재건을 위하여 항구적 국민혁명의 대오(隊伍), 제3공화국의 민정(民政)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오늘 병영(兵營)을 물러가는 이 군인을 키워주신 선배, 전우 여려분, 그리고 군사혁명의 2년 동안 '혁명하(革命下)'라는 불편속에서도 참고 편달 협조해주신 국민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리며 다음의 한 구절로써 전역의 인사로 대신할까 합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 (1963년 8월 30일)

  군사 쿠데타를 주동한 인물이 여당(1963년 1월 김종필의 주도로 창당된 민주공화당)의 후보로 나선 가운데 '민정 이양'을 위한 기묘한 대통령선거가 1963년 10월 15일 실시되었다. 제 5대 대통령 선거인 셈이다. 이 선거전은 대체로 여권의 박정희와 야권의 윤보선으로 압축되었다. 

  1963년 대선에서 특이한 것은 '사상 논쟁'이었다. 대통령 선거전에서 윤보선후보는 박정희 후보의 전력을 폭로하면서, 박후보가 여순반란사건의 주모자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이와 같은 행위는 박후보 전력의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정치적 라이벌을 좌익으로 몰아붙이는, 용공음해의 전통(?)을 세우는 데 기여했을 뿐 아무런 실익도 찾지 못했다. 선거 결과의 개표 집계는 16일 밤까지 윤후보가 리드하다가 17일 새벽부터 박후보가 우세하여 15만 6천여표의 차이로 박정희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중앙정보부는 한때 윤후보의 우세로 집계되자 그를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던 것으로 후일 밝혀졌다. 


한일 회담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4.19혁명 등 정치 격변기를 겪으면서 우리 경제는 극도로 피폐해 있었다. 5.16쿠데타 세력은 이 점을 착안하여 혁명 공약 중의 하나로 '경제 회복'을 외치고 나왔다. 이는 일반 국민들에게 호소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를 회복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서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것이 바로 '한일 국교 정상화'였다. 물론 이 문제는 해방 후 이승만 정권 때부터 추진돼 온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비교적 자주적 입장에서 외교적 협상을 주도해 온 반면, 박정희 정권은 시급한 경제난을 타개한다는 취지에서 굴욕외교를 감수하면서 국교 정상화를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이같은 한일 국교 정상화 추진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적 필요성 외에도 미국의 외교 정책이 맞아 떨어져 만들어진 '합작품이었다. 1960년대 들어 미국은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의 일환으로 한일간의 국교 정상화 문제를 강력히 제기하고 나섰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동아시아의 핵심 국가인 일본과 한국이 양국의 국민 감정과는 관계없이 수교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력을 넣고 있었다.  그리하여 라이샤워 주일 미국대사의 주선으로 박정희 의장이 일본을 방문하여 이케다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의 전기를 마련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2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첫해로 시급한 자본 도입이 요구되었고 화폐 개혁 실시로 경제 상황이 매우 불안정한 관계로 한일 회담의 조기 타결을 서둘렀다. 그래서 11월 김종필이 일본에 건너가 김종필 - 오히라 회담을 열고 여기서 비밀메모 (김-오히라메모)를 통해 대일 청구권 문제 등에 불리한 합의를 해주었다. 일제 36년간의 지배에 대한 보상으로 일본은 3억 달러를 10년간 걸쳐서 지불하고, 경제 협력의 명분으로 정부간의 차관 2억 달러를 연리 35%로 제공하며, 상업 베이스에 의한 무역 차관 1억 달러를 제공한다는 것이 비밀 메모의 골자였다. 청구권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못하고 '독립 축하금'이란 이름으로 무상 3억 달러에 35년 식민통치에 따른 모든 보상 문제를 마무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 협상 내용은 1964년에 이르기까지 2년 동안 비밀에 부쳐졌다.

   1964년 3월 들어 정부는 한일 회담을 재개하면서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 방침을 밝혔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치를 떨었던 국민들은 군사 정부의 굴욕적인 한일 회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3월 24일 서울대를 비롯한 서울 시내 각 대학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일어난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6월 3일에는 시위가 절정에 달하였다. 이 날 정오를 전후하여 1만 2천 여명의 대학생들이 가두에서 경찰과 유혈충돌을 벌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6월 3일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시민의 시위를 통제하기 위한 계엄령을 서울지역에 선포했다. (6.3사태; 이 당시 반대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 세대를 흔히 '          '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시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학생데모가 거세게 일어나자 8월 26일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내렸다. 박 정권은 이렇게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물리치고 1965년 6월 22일 한일 기본 조약과 부수 협정들을 조인한 뒤 여당 국회의원만 참석한 국회에서 한일협정 비준안을 통과시켜 버렸다. 박 정권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일본에서 들여온 차관과 자본으로 경제 개발 계획의 추진과 자금 조달에 숨통을 틀 수 있었다. 

<뒷이야기5> 김종필과 [독도폭파론] 
일본과의 한일협상 과정에 일본은 집요하게 [독도문제]를 제기. 독도문제에 대해 오히라 일 외상은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데 한국이 응해달라고 요청. 한국은 그 문제는 한일회담과는 별개문제이므로 국교정상화 후 시간을 가지고 해결하자고 하였다. 독도문제란 영토문제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 것. 
이 당시 김종필이 오히라 외상에게 던졌다는 말.
" 독도문제가 한일 두 나라 사이에 장애가 된다면 해결방법이 있긴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가서 독도를 한국 공군의 연습장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공군기를 동원하여 며칠간만 폭격하면 독도는 영원히 지도상에서 없어지고 말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후세에 대한 변명을 위해서 '독도는 일본측에서 한일회담의 미끼로 사용하기 때문에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렸다'고 기록에 남기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의 이름도 한일 두 나라에 남게 되겠군요." 

월남 파병 
한일 국교 정상화와 함께 이 당시 한국 경제 성장을 가능하게 한  또 하나의 축은 '월남 파병'이었다. 1964년 본격적으로 월남전에 개입한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우방국에 월남전 참전을 요청하였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64년 9월 11일 의무 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을 파견하였다. 뒤이어 12월 28일 브라운 주한 미국 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하여 한국군 증파를 요청하였다. 한국 정부는 다시 1965년 1월 2일 1개 공병 대대, 1개 경비 대대, 1개 수송 중대, 1개 해병·공병 중대로 구성된 '비둘기 부대'를 추가로 파병하였다. 건국 후 전투 부대가 처음으로 파견된 것이다. 1965년 6월 14일 월남 정부는 수상의 명의로 한국 정부에 1개 사단 규모의 전투 병력 파병을 공식 요청하였고 한국 정부는 다시 '맹호부대'를 파병하였다. 
  이 무렵부터 국내에는 월남 파병을 반대하는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국민적 반발이 거세진 것은 1966년 들어 미국 정부가 추가로 전투 병력 증파를 요청하면서부터였다. 정부 여당은 월남 문제는 우리의 안전과도 직결된다며 증파를 주장한 반면, 야당 측은 우리의 안보도 우려되는데다 미국의 대 월남 정책이 유동적이어서 기약 없는 정글전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낼 수 없다며 반대 입장을 폈다. 그러나 표결에서 이 문제는 찬성95표, 반대 27표, 기권 3표로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66년 6월 1일 이소동 소장을 지휘관으로 하는 '백마부대'를 파견하였다.  
 이 때 우리 정부가 미국측과 파병에 대한 보상 조치로 맺은 것이 이른바 '브라운 각서'이다.  이 브라운 각서는 미국측이 파병의 대가로 한국군의 전력 증강과 경제개발에 필요한 차관 공여를 약속한 것이었다. 브라운 각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추가 파병에 따른 비용은 미국 정부가 부담한다. ② 한국군 육군 17개 사

단과 해병대 1개 사단의 장비를 현대화한다. ③ 베트남 주둔 한국군을 위한 물자와 용역은 가급적 한국에서 조달한다. ④ 베트남에서 실시되는 각종 구호와 건설 등 제반 사업에 한국인 업자를 참여시킨다. ⑤ 미국은 한국에 추가로 AID 차관과 군사 원조를 제공하고, 베트남과 동남 아시아로 수출 증대를 가능케 할 차관을 추가로 대여한다. ⑥ 한국이 탄약 생산을 늘리는 데 필요한 자재를 제공한다. 

 1965년 전투 요원의 파병 이후 1973년 철군할 때까지 8년 5개월 동안 월남전에 참전한 인원은 32만여 명에 달한다. 한국군은 월남전에서 월맹군 4만 1천여 명을 사살하고 7,438평방킬로미터를 '평정'했다. 이 기간 중 우리 측은 5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가요 ;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신중현 작사·작곡, 김추자 노래)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이제서 돌아왔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너무나 기다렸네
굳게 닫힌 그 입술 무거운 그 철모 웃으며 돌아왔네.       
어린 동생 울면서 그 품에 안겼네 모두 다 안겼네
말썽 많은 김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 
의젓하게 훈장달고 돌아온 김상사
동네 사람 모여서 얼굴을 보려고 모두 다 기웃 기웃
우리 아들 왔다고 춤추는 어머니 온 동네 잔치하네
폼을 내는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
믿음직한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    

  월남전 파병은 정치, 경제, 군사적인 측면에서 우리에게 몇가지 의의를 남기고 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해외에 군대를 보냈다는 점, 한국 전쟁 때 미국에 진 빚의 일부를 갚았다는 점, 아시아의 집단 안보에 동참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군사적으로는 이를 통해 국군 현대화와 전력 증강을 기할 수 있었다. 또 경제적으로는 '브라운 각서'와 '월남 특수'를 통해 고용 증대와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반면 우리는 미국의 요청으로 시작된 월남전 참전을 계기로 5천여 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고, 또 다수의 서방 국가들로 부터 비난을 받았다. 특히 월남전에 참전한 장병과 근로자들이 남기고 온 현지인 2세 (통칭 '           ') 문제와 고엽제 피해 등은 아직도 후유증으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뒷 이야기6> 지난 1992년 12월 한국 정부는 베트남과 국교를 재개하였다. 국제 사회에서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뒷 이야기7> 소설 '하얀 전쟁'에 대하여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안정효의 <하얀 전쟁>은 전쟁의 의미나 본질에 대한 규명보다는 전장에 놓인 인간의 행동과 이후의 상처에 더 주목합니다. 그런 작가의 의도 때문인지 이 작품에는 다른 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현장감들 - 훈장을 타기 위해 흔적도 남지 않은 적의 귀를 잘라 나오고 얼굴이 마주 보이는 거리에서 사람을 죽인다는 긴장감 때문에 더욱 광적으로 총탄을 퍼붓고 수류탄을 까 던지는 병사들의 전투장면이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한기주 병장은 보병 9사단 백마부대의 참전 용사로 '베트남 전쟁 전후 증후군'에 시달리는 인물입니다. 1941년생인 그는 미군을 따라다니며 초콜릿 따위를 줍던 어린 시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경이의 눈길로 쳐다보았던 외국인의 신분이 되어 베트남에 찾어 온 한 병장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문득 떠올리며 베트남과 한국의 처지를 비교합니다. 한국 전쟁 때 미국인들이 '국(gook)'이라고 줄여 부르던 원주인 - 한국인이, 이제 다시 새로운 국으로 불리우고 있는 베트남인을 죽이기 위해 미군을 따라나선 것을 두고 한병장은, 
"우리들이 목숨 바쳐 그 대가로 벌어들인 피묻은 돈이 나라의 발전과 현대화를 위한 밑거름 노릇을 했다. 그리고 우리들의 공훈 때문에 대한민국은, 적어도 그 상부계층은 세계 시장으로 거보를 내딛었다. 목숨을 팝니다. 용병의 민족."이라고 말합니다. 
용병으로 베트남에 발을 디딘 한국군을 바라보는 베트남 주민의 시선은 한기주 병장과 같은 소대에 배치된 변진수의 입을 통해,"아까 마을 사람들 봤죠? 꼭 무슨 철천지 원수라도 쳐다보는 그런 눈초리데요. 난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지 알아요. 월남인들은 이 전쟁이 우리들 탓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우리들하고 미군만 돌아가면 당장 전쟁이 끝나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헌데 우린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하며 싸우다 죽나요? 고마워하지도 않는데 말예요. 왜 쓸데없이 이런 나라에 와서 아까운 목숨이 죽나요?"
라는 의문으로 이어지지만 안정효의 시선은 전쟁 체험의 정밀화에 머문 나머지 베트남 전쟁 전체의 파악에까지 더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트콩이 남기고 간 가족 사진을 들여다보며 한기주 병장이 내뱉는 말에 작가의 이런 시각의 한계가 드러나 있습니다. 
" 이 세상의 어떤 이념이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안식과, 사랑과, 인간성을 희생시켜도 좋을 만큼 숭고하다는 말인가?"  
    한기주의 눈을 빌린 작가 역시 베트남 전쟁을 '이념의 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베트콩들이 불러일으킨 전쟁으로 파악합니다. 미국인들이 제3세계의 분쟁에 개입할 때 흔히 써먹는 방법이기도 한, 이념과 생명·안식·사랑 등등을 서로 배치된 것으로 보는 이러한 태도는 이미 한국 전쟁에 대한 해석에서 그 한계가 드러난 바 있습니다. 외세와 싸워 민족의 독립을 실현해야 한다는 베트남 민중의 이념이 어떻게 베트남 민중의 생명·안식·사랑을 찾는 일과 서로 다르게 대립할 수 있다는 것인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러한 시각은 결국은 역사에 대한, 전쟁에 대한 인간적 한계를 고백하는 것에 그쳐 버리고 맙니다.
 한기주가 '엄청난 물자와, 현대적인 장비와, 비행기와, 온갖 발전된 무기를 갖추고 싸우는 한쪽과 까치발과, 못과, 굶주림과 더불어 싸우는 다른 쪽이 벌이는 해괴한 전쟁'을 직접 목격하면서도 왜 물량 자원에서 압도적 우위를 자랑하고 있는 이쪽이 원시적 수단에만 의존하는 저쪽에 밀려가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에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한기주는 마음의 내상을 앓으면서도 출판 일로 살아가지만, 심성이 약했던 변진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폐인이 됩니다. 그날의 죽음의 정글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변진수를 바라보며 한기주는 자신에게 반문합니다.

우리들은 월남 사람이 오라고 해서 그곳 전쟁에 간 것이 아니라 미국인들의 참전 명분을 살려주기 위해서, 미국 돈을 받으며 월남 땅에서 미국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우리들은, 나는, 그리고 변진수는 무엇을 했던가? 응어리 응어리 얽힌 30년 민족 전쟁의 매듭을 하나도 풀지 못하면서, 우리들로서는 이유도 없고 명분도 없는 전쟁을 하느라고 죽음의 계곡에서 나의 전우들은 죽어갔고, 이제 변진수는 영혼의 가사 상태에서 살아간다. 대리 전쟁에서 우리들은 죽음의 손익 계산서에 아무 것도 기록하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들이 백지 답안지를 낸 전쟁 시험이었다. 남은 것은 백색의 공간 뿐, '정의의 십자군'은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아무 자취도 남기지 못한 하얀 전쟁을, 하얗기만 한 악몽을 견디고 겨우 살아서 돌아왔을 따름이었다.....
변진수의 전쟁은 언제 끝나려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벌써 십 년 전에 끝난 전쟁이 왜 그에게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가?

마음과 몸이 다 망가진 뒤에야 두 사람은 베트남전의 본질을 깨닫지만 이미 지나버린 세월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 변진수를 구원해주기 위해 한기주는 권총을 당깁니다.
                <시와 소설로 읽는 한국 현대사>에서 인용

박정희·윤보선의 2차 격돌 (1967.5.3)

야당이 신민당으로 통합하여 67년 6대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고 있을 때 공화당도 때를 같이하여 임전태세를 가다듬었다. 공화당은 1967년 2월 2일 장충체육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했다. 공화당은 "틀림없다. 공화당! 황소 힘이 제일이다."  "박대통령 다시 뽑아 경제 건설 계속하자." "중단하면 후회하고 전진하면 자립한다."는 선거 구호를 내걸었고, 신민당은 "빈익빈이 근대화냐 썩은 정치 갈아치자"  "지난 농사 망친 황소 올 봄에는 갈아치자"  "박정해서 못살겠다. 윤택하게 살길 찾자"는 구호 아래 선거전에 나섰다. 박 후보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 농공 병진 정책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을 역설했고, 윤후보는 정권 교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현재의 대통령 중임제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면서 정부의 경제 시책을 수탈 정책으로 비판했다. 선거전은 지난 대선과는 달리 손쉽게 결판이 났다. 박후보가 총 유효 투표의 51.44%에 해당하는 568만 6666표를 얻어 452만 6541표를 차지한 윤후보를 116만여 표 차이로 나누고 제 6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 3선 개헌 
 정치학자인 사무엘 버틀러는 '권력은 마주(魔酒)'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기도하다가 1960년 4월 부정 선거로 쫓겨난 지 9년 만에 다시 장기 집권을 위한 3선 개헌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68년 12월 17일 공화당 의장 서리 윤치영은 부산에서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의 과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이 같은 지상 명제를 위해서는 대통령 연임 조항을 포함한 현행법상의 문제점을 개정하는 것이 연구되어야 한다"면서 3선 개헌의 물꼬를 텄다. 박대통령은 69년 7월 25일 "야당은 빠른 시일 내에 개헌안을 발의하고 야당은 합법적으로 반대 운동을 펴달라" 는 등의 7개항을 통해 개헌 추진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박정희는 무리수를 던진 것이다. 7월 28일 공화당은 백남억 정책 의장이 마련한 3선 연임 허용을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 골격을 확정한 뒤 소속 의원들에 대한 설득 작업에 나섰다. 
 신민당의 유진오 총재는 "3선 개헌은 민주주의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이며, 이 다리를 넘어서는 날에는 평화적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되찾을 길이 영원히 막힐 것"이라며 개헌 저지 투쟁에 나섰다. 30일간의 공고기간이 끝난 개헌안이 9월 13일 국회 본회의에 회부되자 신민당원들은 표결 저지를 위한 단상점거에 들어갔다. 이렇게 되자 이날 자정 이효상 국회의장은 "13일 본회의는 자동적으로 유회되었으므로 월요일인 15일에 본회의를 열 수 밖에 없다."고 선포하고 본 회의장에서 빠져 나갔다. 
 신민당 의원들이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고 있을 때 건너편 제 3별관에서는 이변이 생겼다. 9월 14일 새벽 2시 30분, 공화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이효상 의장의 사회로 단 6분만에 개헌안이 변칙 처리된 것이다. 국회 주변 반경 500미터는 1천 2백여 명의 기동 경찰이 엄중하게 통행을 차단하고 있는 가운데 개헌 지지자만으로 개헌안을 처리한 것이다.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파동에 이은 또 한번의 변칙 )

박정희·김대중의 한판 대결 (1971.4.27)
 신민당이 1971년 4월 27일에 실시되는 제 7대 대통령 선거전에 김대중 후보를 지명하여 선거운동에 나선 데 반해 공화당은 비교적 차분한 자세로 일선 조직에 열중하고 있었다.

 <신민당의 후보 경선>
  김영삼 원내총무, 40대 기수론 제창  ( 1969.11.8 )( 김영삼 42세, 김대중 45세, 이철승 48세 )

"나와 같은 40대 동지의 승리는 신민당의 승리요, 바로 나의 승리"  (김영삼, 경선 패배 후 성명)        

선거전은 박정희와 김대중 후보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공화당은 조직과 풍부한 자금으로 선거전에 나서고, 신민당은 김 후보의 정책과 전국적인 유세를 통해 이에 맞섰다. 김대중 후보는 10월 16일 첫 기자회견에서 향토예비군 폐지, 대통령 3선 조항 환원의 개헌, 대중경제 구현을 위한 노사 공동 위원회 설치 , 미일중소등 4개국에 의한 전쟁 억제 요구 등을 당면 정책으로 제시했다. 
 유세의 대결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벌어졌던 두 후보의 유세전이다. 박 후보는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찍어달라고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3대 추방, 즉 공산주의의 추방, 가난과 빈곤의 추방, 부정 부패의 추방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또한 김대중후보는 "이번에 정권 교체를 이루지 못하면 박정희 후보가 종신 대통령을 위해 총통제를 실시할 것"이라고 단언하여 많은 국민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선거 운동 과정에서 두드러진 현상은 공화당측에서 노골적인 지역 감정을 조장한 사실이다. 특히 이효상은 "신라 천년 만에 다시 나타난 박정희 후보를 뽑아서 경상도 정권을 세우자"고 지역 감정을 촉발시켰다. 야탕 탄압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김대중 후보의 집에서 폭발물이 터지고 정일형 신민당 선거대책 본부장의 자택에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하는 등 상식 밖의 일이 연달아 발생했다.  정부 여당은 '조작극'이라고 발표하고, 경찰은 김후보 자택의 폭발은 "김후보의 15세된 조카인 김홍준군의 단독범행"이고, 정 선거대책 본부장 집의 화재는 고양이를 실화범으로 밝혀 많은 국민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4.27 대통령 선거는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총 유권자의 79.8%가 투표했다.  개표 결과 박정희 후보가 634만 2828표를 얻어 539만 5900표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94만 6928표 앞질러 당선이 결정되었다.  4.27선거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①지방색의 노출 ② 표의 동서 현상  ③ 여촌야도의 부활이었다. 이 선거에서 영남에서는 72대 28의 비율로 박후보 지지표가 쏟아졌으나 호남에서는 65대 35의 비율로 김후보 표가 나왔다.  

<뒷 이야기8> 71년 대선 후의 김대중
71년 대선 직후 교통사고 당함.  교통사고 치료차 일본에 감.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이에 반대하여 반유신, 반독재 활동을 하던 중 1973년 8월 일본 동경에서 한국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로 국내에 옴. (김대중 납치 사건) 그후 여러 차례 가택 연금 당함. 1980년 5.18후 전두환 정권에 의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음. 미국의 개입으로 석방. 82년 신병 치료차 미국행. 2년여 동안 제 2차의 망명 생활. 1985년 2월 귀국. 87년 7월 10일 사면 복권됨. 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낙선 직후 정계 은퇴 선언. 96년 정계복귀.  9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  

  <조선일보 1997년 12월 19일>

<뒷 이야기 9> 7대 대선,
                     '지역 감정'의 본격적 출발점

①  7대 대선에서 지역 감정이 반영된 말들
. 문둥이가 문둥이 안찍으면 어쩔끼고
. 호남 사람이 받은 푸대접은 1천 2백년 전부터이다. 서울가면 구   두닦이나 식모 모두 전라도 사람이며, 남산에서 던져 차가 맞으면   경상도요, 사람이 맞으면 전라도다.
. 야당 후보가 이번 선거를 백제와 신라의 싸움이라고 해서 전라도   사람들이 똘똘 뭉쳤으니 우리도 똘똘 뭉치자. 그러면 1백 24만표   이긴다. (당시 유권자 영남 460만여명, 전라도가 301만여명)
. 때는 왔다. 전라도 사람은 뭉쳐라 
 (투표일 전야에 부산일대에 나돈 벽보)
. 경상도 물건 안사기, 경상도 차 안타기
 (경북지방에 유포되었다는 흑색선전)

② 선거 다음날 (4.28) 동아일보 사설
 이번 대통령 선거에 있어 지역감정이 현저히 드러나 경상도는 박정희 후보에 거의 몰표를 던졌고, 호남은 김대중 후보에 다수표를 던진 것은 우려할만한 경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지역 감정은 5.16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63년 선거에서 67년 선거로, 다시 이번 71년 선거로 도를 거듭할수록 지역감정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 극단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지역표의 힘으로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평까지 듣게 되었음은 국가적으로 실로 중대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는 근대화를 위해 전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참된 근대화란 절대로 공업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근대화는 첫째 봉건적 지역감정이 해소되고 국민의식이 통일되는 정신적 기반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입으로 근대화가 외쳐지면서 현실적으로는 선거가 거듭될수록 정신적 민족분열이 심화되고 있지 않은가. 지난 날에는 이러한 민족분열이 이 땅에 없었다. 개인적 판단에 의해서 투표 동기가 결정되었으며, 지역감정에 따라 투표되지는 않았다. 누구의 책임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으나 다만 한 가지 뚜렷이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공화당 집권 후 지역감정이 심화되었으며 이 감정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③ 에피소드
선거 후에 지역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다. 5월 15일 부산대에서 부산대, 전남대, 전북대, 충남대, 경북대 등 5개 국립대학교의 학생회장단이 모여 지역 감정 해소를 위한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보다도 이색적이었던 것은 충남 대덕 출신으로서 당시 신민당 정책 심의회 의장이던 박병배가 지역감정을 다소나마 해소시키기 위해 그의 지론인 '팔도사위론'을 공개한 것이다. 4명의 딸을 가진 그는 실제로 전남, 황해, 경북 등지의 출신을 골고루 사위로 맞아들였다. 박병배의 8도사위론은 로이터통신을 통해 해외 토픽감으로 세계에 타전되는 등 화제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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